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중국인의 지혜109 삼십육계(三十六計) - 敵戰計

Author
ient
Date
2018-01-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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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basis63@hotmail.com
출처: 평안신문, 승인 2013.08.14 16:19:19

- 제8계: 암도진창 (暗度陳倉) - 몰래 진창을 넘어가다

원문: 示之以動, 利其靜而有主, 益動而巽 (시지이동, 리기정이유주, 익동이손)
해석: 상대방이 가장 공고하게 지키고 있는 곳을 거짓으로 공격하고, 실제로는 상대방의 가장 허약한 부분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이끈다.

암도진창(暗度陳倉)의 계책에서 ‘진창’은 시안(西安)이 수도로 있는 섬서성(陝西省: Shanxi)에 있는 도시의 옛날 이름이다. 원래 이 계책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사기에서 당시 한(漢)나라의 대장군이었던 한신(韓信)이 사용한 계책으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을 기재하고 있다.

진(秦)나라의 진시황 사망 후, 전국의 군웅들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곳곳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초나라의 회왕(懷王)은 “누구든 먼저 관중(關中) 지역에 입성하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한다” 고 선포하였다.
기원전 207년, 항우(項羽)가 진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함양(咸陽: 진나라의 수도)을 공격하려고 할 때, 이미 유방(劉邦)이 진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함양을 점령했다는 이야기와 민중의 지지를 얻어 관중의 왕이 되었다는 소리를 전해들었다. 이에 크게 노한 항우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유방을 압박하였고, 유방은 할수없이 항우에게 관중 지역을 넘겨주었다.

다음해인 기원전 206년 항우는 자신을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자신의 세력범위를 현재의 강소성과 안휘성, 산동성과 하남성으로 정하였고, 유방에게는 이후 유비의 근거지가 되는 지금의 사천 지역인 촉(蜀)을 주었다. 유방은 분을 참지 못하고 항우에게 저항하려고 하였으나, 유방의 참모인 장량(張良)이 이를 만류하면서 실력을 키운 후 훗날을 도모하자고 권고하였고 유방은 이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사천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중원지역과 통하는 교량을 불태웠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항우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충분한 실력을 갖추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실력을 갖춘 유방은 자신의 대장군인 한신을 보내 항우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 중간에 위치한 진창(陳倉)이란 도시는 전략적 요충지로 항우의 군대가 견고하게 지키고 있어 직접 공략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도 진창을 직접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항우 역시 방심하고 있었다.

한신은 유방에게 이전에 촉으로 쫓겨나면서 불태웠던 관중으로 통하는 교량을 다시 복구해줄 것을 건의하였다. 병사 만명으로 하여금 교량을 수리하도록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명수잔도(明修棧道)”이다. 즉, 적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보여줌으로서 나를 파악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항우의 군대는 교량을 수리하는데 최소한 수년이 걸릴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그 주위에 많은 병사를 주둔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만약의 사태까지 대비한 항우의 군대는 더 없이 방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량 수리를 시작하면서 한신은 자신의 군대를 수개월간 험준한 암벽을 기어오르고 험난한 강을 건너게 하여 진창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한신의 군대는 적군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격으로 진창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중원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초나라와 한나라의 운명이 갈리게 되었고 결국 유방이 전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 계책은 초한의 전쟁 뿐만 아니라 삼국지 그리고 비즈니스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