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95 - 중국 인물열전 (36) 백이(伯夷)숙제(叔齊): 수양산에서 굶어죽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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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36) 백이(伯夷)숙제(叔齊): 수양산에서 굶어죽다

역사서를 들추다보면 영웅, 충신, 간신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시대에서의 해석보다는 후세에 인물들을 평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제는 옳았으나 오늘은 또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을 하기도 한다.

중국과 아시아에서 성인(聖人)으로 추대되는 공자(孔子)도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했으나 훗날 한(漢)나라 이후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 중국 근현대사에서는 봉건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비난받았고, 문화대혁명때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로 다시금 부각되어 중국 정부가 세계 곳곳에 공자아카데미를 설치하고 중국을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동쪽 끝에 진황도(秦皇島)라고 하는 도시가 있다. 진시황이 다녀갔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진 곳인데, 상(商)나라 시기에 ‘고죽국’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한국과도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고죽국의 군왕에게는 백이와 숙제라고 하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다. 백이가 형이었고 숙제가 막내 동생이었다. 당시의 예법으로는 장자가 상속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군왕은 동생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군왕이 죽고 난 후 백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동생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 맞다고 양보했고, 숙제는 형인 백이가 왕위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서로 양보하였고, 결국은 둘째가 왕위를 세습했다.

백이와 숙제의 이 이야기를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에서는 “국가를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인(仁)의 극치이고 백이는 효도를 다하였고, 숙제는 장유유서를 지켰다”고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두 형제는 상나라의 군주인 주(紂)왕이 폭정을 하자 동이(東夷), 즉 한반도 근처로 이주해 생활했다.

얼마 후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통치를 잘해 국내가 안정되고 경제도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상나라의 주왕을 토벌하러 가는 대군을 만나게 되었다. 문왕이 죽고 그 아들인 무왕이 권력을 잡은 후 상나라를 공격하러 가는 길이었다.

형제는 무왕앞에 나가 “아직 아버지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니 이것이 효도입니까?”라고 따졌고 이어서 “신하가 임금을 토벌하려고 하니 이것이 인(仁)입니까?”라고 무왕을 비난했다. 이에 화가난 무왕이 이 두 형제를 죽이려 하자 당신 주나라의 재상이었던 강태공(姜太公)이 “이들은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니 죽이지 말고 놓아주라”고 간언하였다.

이후 무왕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1046년에 주나라를 세웠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에 부끄러워하면서 주나라의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죽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 두 형제를 높게 평가하고 충성과 의리, 효도를 모두 갖춘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새겨보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폭정을 일삼는 위정자를 제거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을 과연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폭군을 제거한 무왕을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시대를 살면서 너무나 쉽게 옳고 그르다는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우리가 잘했다고 믿는 것이 내일에 가서는 잘못으로 비판받을 수도 있고 또 칭찬받을 수도 있다. 인생은 마치 불경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한 구절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