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21세기 중국의 빛과 그림자 66 중국식 정치재판 - 구카이라이(谷開來: 보시라이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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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nt
Date
2018-01-0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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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email protected]
출처: 평안신문, 승인 2012.08.16 15:22:13

올해 10월에 권력교체를 앞두고 있는 중국 공산당 수뇌부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고 충칭시 당서기로 중국 정치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보시라이의 낙마 소식이었다.

보시라이의 낙마는 왕리쥔(王立軍)이라는 자신의 심복이던 충칭시 공안국장이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보시라이의 부인인 구카이라이는 영국의 사업가인 닐 헤이우드를 독살하였고 이를 왕리쥔이 공개하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 심지어는 중국공산당의 권력투쟁까지 불이 붙게 되었다. 급기야 상하이에 있던 쟝저민이 베이징으로 올라와 권력간의 이견을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중국의 안휘이(安徽)성 허페이(合肥)시에서 구카이라이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에 있다. 권력자와 그의 부인이 연루된 이 사건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장칭(江靑)과 사인방(四人幇)’에 대한 재판과 유사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결속이나 공산당의 권위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장칭은 산둥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배우로 성장하였다. 이후 마오쩌둥을 만나 정치에 개입하면서 권력에 대한 강한 욕구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면서 중앙문화혁명 소조 제1조장으로 활동하였고 1973년에는 중국 공산당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사인방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80년에는 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81년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1983년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자살로서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최고 권력자의 부인에서 사형수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하였다.

반면 실제로 당대 중국의 최악의 시기였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였던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중국 공산당은 공로가 70%이고 과오는 30%라고 평가하면서 마오쩌둥의 위상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이번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보시라이에 대해서는 직위만 해제 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이 궁금증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풀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에 대한 객관적 평가나 그의 잘못에 대한 시인은 결국 중국 공산당 자체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며, 공산당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유지하는데 신뢰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 마오쩌둥은 그대로 두고 정치적 재판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사건 역시 그 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일맥상통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에서의 사법에서는 보시라이가 결코 법적인 테두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이 사건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심지어는 깊숙이 개입 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빠져 있다.

중국의 핵심 권력층의 한 축을 이루는 태자당의 구성원이고 이와 관련한 복잡한 권력관계에서 만약 보시라이를 사법대상에 올려 처벌할 경우, 밝혀지지 않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많은 제2, 제3의 보시라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법제도 특히 정치인과 관련한 재판은 언제나 정치가 우선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이며, 여전히 중국은 공산당의 국가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