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83 - 중국 인물열전 (24) 이태백(李太白 701-762): “달을 훔치려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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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nt
Date
2018-01-0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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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24) 이태백(李太白 701-762): “달을 훔치려던 시인”

한국의 구전 동요중에 가장 많이 불리우는 노래를 꼽으라면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고 하는 달타령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노래에서 나오는 이태백은 당나라 시기에 활동한 중국 최고의 시인(詩人)으로 두보(杜甫)와 함께 시선(詩仙)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태백은 출생과 사망 모두 신비에 가려있고 이와 관련하여 많은 설들이 존재해오고 있다. 첫째 이태백이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것이고 둘째는 그가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설이다.

이태백의 원래 이름은 이백(李白)이고 자(字)가 태백이다. 한국에서는 이태백, 중국에서는 이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조상은 원래 중국 사람이었으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후 조상이 서쪽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동서교통로였던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의 키르기스탄까지 피신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이태백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엽성(葉城)이란 곳으로 중국과 서역의 교역에서 중요한 지역의 한 곳이었다. 지금도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만나게 되고 아름답고도 웅장함을 뽐내고 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으로,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향하는 말과 낙타를 모는 수많은 대상(隊商)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는 5살 때 아버지를 따라 다시 중국의 사천성으로 돌아와 유년시절을 보냈다. 호탕하고 기개가 넘쳤던 이태백은 그의 재주를 높게 평가한 당나라의 현종에게 관직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문서작성과 황제와 궁중을 위한 일종을 궁중시인의 역할이었다.

이태백이 궁전에서 일할 때의 황제가 바로 당나라의 현종이었고, 중국 4대 미인인 양귀비가 후궁으로 있을 때였다. 그는 더 이상 황제와 첩에게 아부하기 싫어지자 관직을 벗어던지고 중국의 각지를 돌면서 친구를 사귀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술병을 옆에 끼고 살만큼 술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술마시는 신선(酒中之仙)”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가 방랑하던 동안 당나라에는 당시 안녹산이란 서역출신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의 와중에 양귀비가 죽었다. 지금도 서안(장안)에 가면 양귀비가 목욕했다고 하는 화청지(華淸池)가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태백은 다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감옥에 갇히고 또 유배를 당하였다. 그는 풀려난 이후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고 술과 함께 세상에 자신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모두 1,100편에 달하는데 그 내용은 현실을 벗어난 낭만주의로 지금도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작품 중 “술을 권한다”는 ‘장진주(將進酒)’와 “달 아래 혼자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月下獨酌)’은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다.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奔流到海不復廻(군불견황하지수천상래분류도해불복회: 황하의 물은 하늘에서 흘러내려 바다로 흘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네)”로 시작하는 ‘장진주’는 “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그대와 함께 마시니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로 끝을 맺고 있다.

또 걸출한 작품인 월하독작은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으로 시작한다. “꽃 사이에 술 한병을 혼자 마시니 친구가 없네. 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니 그림자에 비쳐 셋이 되었네”라는 내용이다.

수많은 칼과 창을 들고 전장터를 휘저었던 많은 영웅호걸들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술병과 붓 한 자루를 들고 세상을 떠돌았던 이태백은 지금도 이국타향인 우리의 동요속에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