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82 - 중국 인물열전 (23) 장건(張騫 BC164-BC114): 실크로드(silk road)를 열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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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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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역사란 필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육상의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로 구성되어 있다. 실크로드란 단어는 독일의 역사학자 리히토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1877년에 출판한 ‘중국, 나의 여행(China, Ergebnisse eigener Reisen)’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실크로드는 처음부터 무역을 위해 만들어진 길은 아니었고 오히려 군사적 정치적 목적으로 우연하게 탄생하게 되었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후 한무제(漢武帝)에 와서 국력이 신장되었으나 여전히 북방민족인 흉노(匈奴)족은 중국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도 잠을 잘 수 있으며 빠른 기동력을 가지고 있어 한족들뿐만이 아니라 유럽에게 있어서도 공포의 대상이 될 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특히 농경문화의 한족들에게 이들의 침략은 재앙이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건설한 이유도 바로 흉노의 공격에서 피해보고자하는 고육책이었다.

세력을 키운 흉노는 중국의 동북부 및 서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서역으로 가는 길목을 점령하여 주위의 국가들을 약탈하여 한나라와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때 한무제는 잡은 포로로부터 서쪽 지역에 대월씨국이 있으며 흉노와 원한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월씨국은 지금은 돈황 부근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나 흉노에 쫓겨 더 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한무제는 대월씨국과의 협력을 위해 장건에게 100명의 수행원을 주고 장안(서안)을 출발해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통해 가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하서주랑 지역은 이미 흉노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장건 일행은 흉노 기마병에게 붙잡혀 그들의 수도(지금의 내몽고 후허하오터)로 압송되었다.

흉노에게 붙잡힌 장건은 약 10년 이상을 포로 생활을 하였다. 이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한 장건은 대월씨국에 무사히 갔으나 이들은 이미 흉노와의 전쟁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던 장건은 또 흉노에게 붙잡혀 1년간의 포로 생활을 하였다. 이후 흉노의 내부적 갈등을 이용해 10여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건은 자신이 경험했던 흉노 서쪽의 나라들,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심지어는 인도와 관련한 많은 지식들을 분석하고 기록했으며 이를 한무제에게 보고 하였다. 장건의 경험은 중국에게 중국 이외의 새로운 나라들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한무제는 장건에게 300명의 수행원과 함께 다시 서역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이들 나라에도 중국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최초의 실크로드가 개통되었다. 이후 서역의 각 나라들도 중국과의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로마까지도 연결되는 실크로드가 완성되었다.

장건에서 시작한 최초의 실크로드는 당나라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의 제지술과 도자기, 비단 등이 이 길을 따라 중동과 유럽으로 전해졌으며, 서역으로부터도 불교와 기독교 등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많은 지역들이 무역 중계를 함으로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돈황의 경우 중국과 서역의 갈림길이어서 더욱 번성하였다.

그러나 토번(지금의 티벳)이 세력이 강해지고 이 육상실크로드를 점령하자 당나라는 바다를 통한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해상실크로드이다. 장건에서 시작한 실크로드가 지금 중국에 의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의 새로운 실크로드 정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