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74 - 중국 인물열전 (15) 상앙(商鞅 BC 395-338): 법치를 통한 부국강병

Author
ient
Date
2018-01-09 18:01
Views
107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출처: 평안신문

많은 경험을 통해 국가와 조직이 잘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다. 중국을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유래가 진(秦: Chin)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진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기초를 만든 사람이 바로 상앙(商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에 접어들었고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생산도구의 변화로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하였고 각국이 부국강병에 힘쓰고 있을 때였다. 당시의 제(齊), 초(楚), 연(燕), 조(趙), 魏(위), 한(韓), 진(秦)을 가리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렀다. 그 중 가장 서쪽에 있던 진나라는 국력이 약했고 낙후된 국가였다.

상앙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과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의 재능을 발견한 위(魏)나라의 재상이 자신의 가신으로 데리고 있다가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되자 당시의 왕인 위나라의 혜왕에게 추천을 하였다. 그는 혜왕에게 만약 상앙을 쓰지 않을 경우 반드시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혜왕은 상앙을 쓰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았다. 상앙은 위나라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위나라를 떠났다.

위나라를 떠난 상앙은 진(秦)나라로 왔고 진의 효공(孝公)은 그를 중용하였다. 진나라 왕이 법을 개혁하고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많은 권문세가의 반대에 직면했다. 왕은 상앙에게 법치와 개혁을 명령했다. 상앙은 진나라 수도의 남문에 3미터 높이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공고를 붙였다. 만약에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면 10냥의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상금을 50냥으로 올렸다.

이때 한 사람이 나타나 반신반의 하면서 기둥을 남문에서 북문으로 옮겼고 정말로 50냥의 상금을 받았다. 이 얘기가 일파만파 퍼져 나가면서 진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정부의 정책을 믿게 되었다.

백성들에게 정부가 정책을 시행하는 것에 신뢰를 얻은 후 두 번에 걸쳐서 법을 개정하였다. 먼저 호적제도를 개선하고 상과 벌에 관한 법률을 확실하게 제정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의 세습을 폐지하여 국민의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법치의 실행은 많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귀족들은 왕자를 동원하는 등 이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앙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황족조차도 엄벌에 처함으로서 누구도 감히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

상앙의 새로운 법률 시행 10년 동안 진나라의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 진나라는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영역에서 6개의 나라를 능가하였고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이에 멈추지 않고 토지법을 개혁하였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였다. 즉 토지 매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상앙은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했는데, 바로 진시황의 중앙집권의 기초가 이때 만들어졌다. 진시황이 실시했다고 알려진 도량형의 통일도 사실은 상앙이 이미 그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경제가 더 체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도성을 함양(지금의 서안)으로 이전하여 통일 중국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진나라가 전국칠웅(戰國七雄)을 통일했다는 결과보다 그 과정을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