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73 - 중국 인물열전 (14) 악비(岳飛 1103-1142): 진충보국(盡忠保國)의 영웅

Author
ient
Date
2018-01-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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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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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14) 악비(岳飛 1103-1142): 진충보국(盡忠保國)의 영웅

중국 역사에서 지나간 수많은 영웅 호걸중에 악비(岳飛)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여운을 남긴다. 외침으로 인해 국가가 어려울 때 목숨으로 국가를 수호한다는 ‘진충보국(盡忠保國)’의 정신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악비가 태어나던 무렵의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혼란기를 거쳐 새롭게 등장한 송나라 시기였다. 송나라도 초기에는 당나라를 능가하는 번성기를 거쳤으나 문관우대 정치를 실시하고 국방을 소홀히 하면서 외침에 노출되어 있었다.

북쪽에서는 유목민족들이 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노리고 있었고, 그중 거란족의 요나라가 먼저 송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후 더 강한 유목민족인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나라를 공격하자 원래의 수도였던 개봉(開封)을 포기하고 남쪽 항주(杭州)로 피신했다. 그래서 송나라는 크게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나누어 불린다.

외침이 빈번했던 시기에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난 악비는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군사, 전략가로 그리고 민족영웅으로 추대받고 있다.

당시 송나라의 황제와 관료들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했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 금나라는 이러한 허약한 송나라를 노려 수많은 도시를 함락시키고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이때 악비가 분연히 일어나 금나라에 대항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한탄하며, “문관이 돈을 좋아하지 않고, 무관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천하가 태평하다(文臣不愛錢, 武臣不惜死, 天下太平矣)”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말이다.

악비가 군대에 들어간 후 간신들에게 모함당해 죽기전까지 금나라의 군대와 수백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빼앗긴 중원의 땅을 회복하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금나라와 전투를 계속했고 백성들은 그를 지지했다.

그의 어머니는 악비를 불러 ‘진충보국(盡忠保國)’이라는 글자를 등에 새겨주었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당부했다. 그가 이끌던 군대를 악비군(岳飛軍)이라고 했는데 모두가 용맹했다. 그의 병사들이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악비가 엄격한 규율과 명확한 상벌제도를 시행했고 솔선수범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집을 하사하자 아직 적들을 다 섬멸하지 못했는데 무슨 집이 필요하냐고 하면서 군대의 막사에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황제가 하사한 재물들도 모두 자신의 군대와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당시의 금나라 군대는 악비군(岳飛軍)을 보면 도망가기 바빴는데 산을 옮기는 것보다 악비군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금나라는 악비의 거센 반격에 더 이상의 진격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송나라에 화친을 요구했다.

유약했던 송나라 조정은 황제와 문관들이 금나라와의 화친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악비는 많은 백성들이 금나라의 점령지에서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는데 화친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했고, 자신의 군대만으로 어려운 전쟁을 계속했다.

이때 진회(秦檜)라는 간신이 금나라와 내통하여 악비가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하였다. 무능한 황제는 자신의 말을 잘듣지 않는 악비를 결국 감옥에 가두고 살해하였다. 무능한 황제와 간신의 합작이 당시 최고의 충신을 제거해버린 순간이었다.

이후 송나라는 징기스칸의 몽골족에게 멸망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국가나 조직의 성공과 실패는 지도자의 능력과 자질,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재를 아끼지 않고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빠지게 되면 국가도 조직도 결국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