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70 중국 인물열전 - (11) 측천무후(則天武后): 천하를 호령한 여황제

Author
ient
Date
2018-01-0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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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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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11) 측천무후(則天武后): 천하를 호령한 여황제

중국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누렸던 당(唐)나라 시기에 그리고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여자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측천무후(則天武后)라고도 하고 무즉천(武則天)으로 불리기도 하는 불세출의 뛰어난 여성지도자였다.

그녀는 명문세가의 규수 출신도 아니었고 지금 중국 산서성의 문수현(文水縣)이라는 작은 마을의 목재상의 딸로 태어났다. 14살에 입궁하여 재인(才人)이 되었으나 당의 태종(太宗)이 죽자 감업사(感業寺)라는 절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여승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사모하던 고종에 의해 다시 궁으로 들어와 소의(昭儀)가 되었고, 황후를 폐하고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었다.

고종은 병이 많아 측천무후가 황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고 점차 권력과 군의 통수권이 그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는 인문과 역사에 뛰어났고 과감하고 총명했다. 고종이 죽은 후 중종(中宗)이 즉위하였으나 폐위시키고 이어서 예종(睿宗)도 폐위시켰다. 이후 자신이 직접 국호를 ‘주(周)’라고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칭했다.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여황제는 82살에 병으로 죽을 때까지 4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당나라 100년의 전성기중 그녀가 통치한 기간이 절반을 차지 할 만큼 국가를 잘 다스렸다.

그녀가 황제에 즉위하자 많은 구관료들과 황족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몇몇 장군들과 관료들이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30만 대군을 파병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들이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오히려 민심은 측천무후를 지지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결국 실패한다는 사실이 동서고금을 통해 한번 더 입증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 후 당시 서쪽 지역의 토번(티벳)이 토욕혼(土谷渾)을 합병하고 당나라의 서쪽 지역을 점령하자 군대를 보내어 이 지역을 회복하여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을 다시 확보하였다.

또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제도를 개선했는데 원래의 취지에 맞지 않게 점차 귀족 자제만이 관리로 등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가 직접 시험을 관장하는 전시(殿試)를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인재를 선발할 수 있었고 무관을 뽑는 시험을 실시하여 과거제도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인재중 지금까지도 이름이 전해져오는 적인걸(狄仁杰)도 그녀가 직접 뽑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를 추천할 수 있는 제도도 만들었다. 그녀는 인재에 있어서만큼은 “사람을 잘 쓸 줄 알고, 또 능력있는 인재를 잘 쓸 줄 알았다(善于用人 , 善用人才)”는 평가를 받았는데, 바로 이것이 측천무후의 힘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국가의 외부를 안정시키고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를 갖춘 후, 측천무후는 경제부흥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고 이를 통해 당나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성하고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우선 생산을 중요시하여 지방관리들의 업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만약 한 지역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면 관리들을 강등시키거나 파면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지방 관리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하고 부역을 면해주는 ‘친민정책(親民政策)’을 실시하여 생산량과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군대 역시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병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신하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그녀는 자신들의 친척들을 배제하고 다시금 당나라로 환원시켜 자신이 죽은 후에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였다. 중국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300여명의 황제들 중에 비록 유일한 여자 황제이지만 걸출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