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69 중국 인물열전 - (10) 손무(孫武):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쓰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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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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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10) 손무(孫武):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쓰다

군인이나 정치인, 기업가 할 것 없이 어떻게 생존하고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을 한번쯤은 읽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손자병법은 세계 최초의 완전한 병법서이고 훗날 사람들이 ‘병법의 성경’이라고도 부른다.

손자병법을 쓴 사람이 바로 손무(孫武)로 원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제나라의 장군이었고 어릴때부터 무술연마와 병법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이 가장 혼란했던 춘추시기가 끝나갈 무렵으로 약육강식의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주위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이것들을 기록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군대의 배치와 이동상황을 그리고 전쟁의 발생원인과 경과, 결과를 분석하고 자신의 느낌을 서술했다. 장기간 자료를 수집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직접 전투를 참관하기도 하는 등 병법을 연구하였다.

기원전 517년 손무는 오자서(伍子胥)의 추천으로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밑에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편찬한 병법 13편을 오나라의 왕에게 주었다. 이를 본 왕은 비록 이론은 대단하지만 실제 전쟁에서의 운용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왕이 손무에게 180명의 궁녀들을 훈련시키라고 명하자 그는 오왕의 애첩 두명을 대장으로 삼아 줄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이 명령을 듣지 않고 웃고 떠들자 두명의 애첩을 참수했고 이에 놀란 궁녀들은 바로 명령을 잘 듣기 시작했다. 오왕은 손무를 장군으로 삼았다.

손무의 엄격한 훈련으로 오나라 군사들의 전투력은 향상되었고 기원전 512년 손무와 오자서의 지휘로 초나의 속국을 공격하였다. 또한 506년 초나라가 공격해오자 3만명의 병사로 20만명의 대군을 격파했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는 전략을 성공시킨 것이다.

당시 오나라와 인접해있던 월(越)나라는 항상 사이가 좋지 않아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오나라의 합려와 월나라의 구천(句踐)이 절강성의 취리(檇李)라고 하는 곳에서 전투를 하였다. 이때 월나라의 화살을 맞은 합려는 결국 죽게되고 후에 태자인 부차(夫差)가 왕이 되었다. 합려는 죽으면서 아들에게 자신의 원수를 갚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합려가 죽자 구천은 오나라를 우습게보고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부차는 10만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강소성 태호에서 적을 맞이하였다. 손무의 계획대로 야간기습을 단행하여 월나라의 구천이 위기에 빠졌다. 구천의 참모였던 범려(范蠡)는 오나라의 승상 백비(伯嚭)에게 뇌물을 주어 화친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때 오자서(伍子胥)는 절대로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월나라에게 뇌물을 받은 백비로 인해 화친하게 되었다. 월나라의 구천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면서 훗날을 기약하였다.

전쟁을 이긴 부차는 주위의 말을 듣지 않고 교만에 빠지게 되었다. 충신이었던 오자서를 죽였는데 오자서는 죽으면서 “내 눈을 빼서 동쪽문에 걸어다오. 죽어서도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하는 것을 봐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손무는 부차의 교만함과 간신에게 빠진 것을 보고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쟁에서 지지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완성하였다.

이후 10여년이 흘러 월나라의 구천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교만에 빠져있던 오나라의 부차는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 지도자가 교만에 빠지고 간신들이 들끓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그 옆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국가든 기업이든 모든 조직의 성공과 실패는 지도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