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68 중국 인물열전 - (9) 강희:(康熙 1654-1722): 청나라의 번성을 열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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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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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중국의 황제 시스템은 1911년 10월 10일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그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다. 마지막 황제란 영화로 유명했던 선통제(宣統帝)부의(溥儀)가 1912년 2월 원세개에게 퇴위를 선언하는 조서를 내리고 이민족인 만주족의 역사가 사라지게 되었다.
만주족의 전신은 여진족(女眞族)으로 우리의 압록강과 두만강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1616년 누루하치(努爾合赤)가 후금을 세운 후 명나라가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누르하치는 1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8번째 아들인 황태극(皇太極)이 권력을 장악하고 심양(瀋陽)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정했다.
이후 청나라와 명나라는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는데 당시 조선(朝鮮)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반대하고 명나라의 편에 서게 되었다. 황태극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항복하게 되었고 이후 청나라는 후환없이 명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다.
부패하고 무능했던 명나라는 1644년 농민반란군인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무너졌다. 이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는 명나라 황제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와 결탁하여 만리장성의 문을 열어주고 청의 군대를 받아들였다.
중원으로 진격한 청나라는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이때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든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으로 도망가 망명정부를 세웠고 기타 지역은 모두 통일하였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하고 장개석이 대만에 국민당 정부를 세워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것을 보면 역사는 어쩌면 반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희제는 아버지 순치제(順治帝)가 전염병으로 죽은 후 8살에 황제에 올랐다. 당시 군부를 장악했던 오배(鳌拜)가 어린 황제를 협박하고 전횡을 휘둘렀는데 14살이 되던 해에 오배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황제에 오른 강희제는 청나라의 후환이었던 명나라 출신의 오삼계 등의 명나라 장군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또한 대만을 복속시켜 중국의 영토로 삼았고 1만명의 병사를 보내 대만을 지키도록 하였다.
강희제를 시작으로 옹정(雍正)과 건륭(乾隆)의 3대를 청나라의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강희제는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하고 자신의 심복을 각지로 보내 민간의 실제 상황을 파악함으로서 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평민으로 위장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살폈고, 6차례에 걸쳐 대운하를 따라 남방을 순시하였다. 황하유역과 장강유역의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벼의 품종을 새로 개발하는 등의 노력도 함으로서 비록 만주족 통치자임에도 불구하고 한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강희제의 남쪽 순시는 대운하를 중심으로 많은 도시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으며 황제가 머물던 지역은 물류와 문화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특히 남경 근처의 양주(揚州)는 경제가 번성해서 ‘어미지향(魚米之鄕:수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하다는 뜻)’의 별칭도 얻게 되었다. 청나라의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고 인구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족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양의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문화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개방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고, 지금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티베트 지역과 몽골 지역도 청나라의 관할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티베트에 대한 문제는 사실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