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67 중국 인물열전 - (8) 주원장(朱元璋 1328-1398): 황제가 된 스님

Author
ient
Date
2018-01-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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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8) 주원장(朱元璋 1328-1398): 황제가 된 스님

역사의 흐름을 따라 중원(中原)의 주인은 쉬지 않고 변화되었다. 특히 중국 최고의 번영기였던 당나라를 거친 후 세워진 송나라 시기에는 북방 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공격을 받았다. 송나라는 결국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송시대를 열고 있었는데 진정한 북방의 강자가 나타났다.

만리장성 이북의 광활한 초원을 통일하고 서쪽으로 유럽까지 손에 넣은 몽고족이 등장했다. 이들은 몽고말이라고 불리는 작은 키에 두꺼운 발목의 말을 타고 세계를 정복했다.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공격했으며 중국의 베이징에 도읍을 정하고 원(元)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이 한족(漢族)을 탄압하고 억압하면서 도처에서 원나라에 저항하는 농민과 종교 반란군이 나타났다.

이때 안휘성(安徽省) 출신의 주원장이 등장하였다. 주원장은 평민출신으로 황제가 된 유방(劉邦)보다 훨씬 더 극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고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극심한 재해로 굶어 죽었다.

주원장은 살기 위해 황각사(皇覺寺)라고 하는 절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스님이 되어 절내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이 생활도 잠시 뿐이었고, 절도 먹을 것이 떨어지자 걸식을 하는 탁발승이 되었다. 3년간에 걸쳐 걸식을 하고 각지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지가 황제가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 3년의 기간을 통해 주원장은 세상에 대해 눈뜨는 기회가 되었고 풍부한 사회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다시금 황각사로 돌아온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또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때 원나라에 저항하는 다양한 집단중에서 백련교(白蓮敎)와 홍건군(紅巾軍)이 나타났다.

주원장은 25세에 홍건군의 수령인 곽자흥(郭子興)의 수하로 들어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전투를 할 때는 누구보다 앞장섰고 전리품은 모두 자신의 수령에게 상납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겨도 절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그 공로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양보했다. 이를 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주원장을 따르게 되었다.

홍건군 간에 내분이 일어나 곽자흥이 포로로 잡혔을 때 용감하게 자신들의 사병을 이끌고 곽자흥을 구해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을 돌려주었다. 곽자흥이 병사한 후 주원장이 홍건군을 이끌게 되었다.

주원장은 우선 군대내의 규율을 엄격하게 정하고 민간인들에 대해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함으로서 사병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주원장은 양자강 남쪽 지역을 통일하고 1368년에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하고 명(明)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그해 7월에 대군을 이끌고 천진을 공략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결국 원나라의 황제 순제(順帝)는 부하들을 이끌고 만리장성의 거용관(居庸關)을 넘어 몽고 초원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다시금 한족(漢族)이 중원을 차지한 것이다.

주원장은 중국을 통일 한 이후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불렀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대명률(大明律)이라는 엄격한 법을 선포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과거제도를 부활시키는 등의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한편 그의 어릴 때의 성장환경은 의심과 질투, 그리고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등 공과(功過)가 겹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