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66 중국 인물열전 - (7) 당태종(唐太宗): 정관지치(貞觀之治)

Author
ient
Date
2018-01-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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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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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7) 당태종(唐太宗): 정관지치(貞觀之治)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북주(北周)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 수(隋: 581-618)나라를 건국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문제(文帝)는 서안(西安)에 도읍을 정하고 중국을 재통일 하였다.

황제가 된 양견은 남북조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실시하고 대운하(大運河)를 건설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는 “예로부터 황제가 사치하면 오래가는 법이 없다(自古帝王未有好奢侈而能久長者)”라는 말을 명심했고 솔선수범해서 근검절약의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수양제(隋煬帝)도 만리장성을 수리하고 국가발전에 힘을 쏟아 국력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조급하게 결과를 내려고 서두르고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수차례 시도하면서 국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반란군의 손에 죽게 되었다.

수나라는 겨우 30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당(唐)나라가 등장하였다. 수나라 말기 관리였던 아버지 이연(李淵)이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李世民)과 힘을 합쳐 당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이연이 황제의 자리를 다른 아들에게 주려고 하자 이세민은 쿠데타(현무지변: 玄武之變)를 일으켜 태자를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한 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명한 ‘정관지치(貞觀之治)’로 당나라의 번성기를 만들어 낸 당태종이다.

비록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훌륭한 인재를 잘 등용할 줄 알았고 치국(治國)에도 능했다.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이전에 자신에게 대항했더라도 능력이 있는 자는 중용했고, 또한 출신성분을 묻지 않고 과거제를 통해 인재들을 선발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는 인재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수나라 양제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독단을 저질렀던 것에서 교훈을 얻어 누구라도 황제의 정책이나 결정에 대해 비판하거나 간언할 수 있도록 언로(言路)를 개방하였다. 지금도 조직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의 잘못된 정책이나 결정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황제에게 그 잘못을 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열린 정책이 중국의 역사상 최고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의 기초하에 3성6부를 설치하여 상호간에 견제할 수 있도록 하였고 농지법과 세법 등을 현실화하여 국가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도를 완성한 이후 서역과의 무역과 교류에 힘을 쏟았고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당시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은 세계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불야성을 이루었다. 지금도 서안에 가면 과거의 흔적들을 도로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영토도 동서남북을 가릴 것 없이 확장에 나섰다. 특히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 등에 세워졌던 토욕혼(土谷渾)을 멸망시키고 돌궐족을 몰아내어 서쪽 지역을 당나라의 영역으로 복속시켰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태종이 645년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요녕성(遼寧省)의 해성(海城)에 있는 안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안시성을 지키던 장군 양만춘의 강력한 저항에 패배하여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고구려의 국력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