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64 중국 인물열전 - (5) 한무제(漢武帝): 공자를 부활시키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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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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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5) 한무제(漢武帝): 공자를 부활시키다

유방(劉邦)이 초패왕 항우(項羽)를 이기고 한(漢)나라를 세운 후 수명의 황제들이 등극했다. 그중 한무제(漢武帝)라고 불리는 유철(劉徹: BC 156-BC87)의 정책들이 훗날 중국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춘추전국 시대의 다양한 사상과 철학들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특히, 도교(道敎)가 황실 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무제는 유명한 학자였던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자(孔子)의 유교(儒敎)를 국가 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다. 우리가 유교하면 떠올리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을 중심으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말하며 황제는 곧 아버지와 같고 하늘이 내린 것으로 충성과 효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이때부터 강조되었다.

동중서는 ‘파출백가, 표창육경(罷黜百家, 表彰六經)’을 주장하였는데 그 내용은 유교를 제외한 나머지 사상들은 멀리한다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의 사상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한무제를 만나 다시금 부활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사상적 근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유교의 채택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사상적 기초를 완성하는 동시에 일부 남아있던 제후들에게는 경제권만을 주고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그 지역을 직접 관장하도록 함으로서 지방 제후의 힘은 약화되었고 모든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도록 하였다.

이때 완성된 중앙집권적 체제가 역사를 관통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일부에서 중국 분열론을 이야기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한무제는 국가와 정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권을 국가가 소유하였고 소금에 대한 전매권은 청나라시기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또한 물가도 중앙이 관리함으로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한편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이전의 세습적 귀족제도를 타파하였다. 능력만 있으면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찰거제(察擧制)’를 실시하는데 약 300년간 유지되었고, 훗날 당나라 시기에 ‘과거제(科擧制)’로 완성된다. 과거제는 1905년까지 약 1300년이나 유지되었으니 모두 합쳐서 16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무제의 인재선발은 귀족이나 평민, 노비 등을 가리지 않고 능력만 뛰어나면 국가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훗날 반고(班固)라는 학자는 “한나라가 인재를 얻는 것이 이토록 대단했구나(漢之得人,于此爲盛)”라고 감탄을 하였다. 실제로 당시 한나라가 발전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을 살펴보면 노비나 평민 출신들이 많이 있었다.

한무제는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동서남북으로 영토확장에 나서게 된다. 서쪽으로는 흉노족을 회유하고 공격하여 돈황(燉煌)과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嘉峪關)을 영토에 편입시키고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감숙성(甘肅省)의 ‘하서주랑(河西走廊)’지역을 점령하였다.

한무제의 서역진출은 이후 당나라때 번성했던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간의 새로운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시작이었고,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건너가고 또 유럽의 문물이 중국에 전해져 동서문명이 통하게 되었다.

한편 동쪽으로는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요동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는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슬픈 사랑이야기도 이때 만들어졌다. 또한 한무제 시기에 우리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