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36 비즈니스 삼국지 - (17) 제갈량의 인정과 법치의 조화

Author
ient
Date
2018-01-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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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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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17) 제갈량의 인정과 법치의 조화

제갈량이 활동하던 옛날이나 지금까지도 중국은 ‘인정(人情)과 법치(法治)’가 공존해서 그 선을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중국인에게 있어서 인정은 꽌시(關係), 체면(面子)과 함께 사회 구성원간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고, 지금도 그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

유비가 사천성으로 들어와 촉나라를 세운 후, 제갈량은 개국초기 법치(法治)를 강조했고 다양한 법령을 제정하고 선포하여 촉나라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촉나라는 위나라와 오나라와 비교해서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제갈량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른 두나라와 견줄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제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하기위해 오나라의 손권을 공격하다가 이릉(夷陵)전투에서 패배하고 백제성(白帝城)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제갈량과 이엄(李嚴)을 불러 자신의 아들인 유선(劉禪)을 잘 돌봐주기를 청했다. 삼국지에서는 이를 ‘백제성의 탁고(托孤)’라고 하는데, 당시 제갈량은 승상을, 이엄은 상서령(尙書令)을 맡고 있었다. 이엄은 원래 유장(劉璋) 밑에 있다가 훗날 유비에게 투항한 사람으로 유비에게 공을 세워 상서령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서기 225년 제갈량이 유비가 죽은 이후에 위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엄은 권력에 욕심을 내고 제갈량에게 왕의 작위를 받으라고 권고하고 자신에게도 몇 개의 영지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에게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자 이후 제갈량에 대해 마음속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231년 제갈량은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을 하였고, 이때 이엄을 시켜서 군량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당시에는 전쟁을 하기 위해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따라서 보급선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기도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항상 전쟁을 위한 보급선을 미리 구축한 이후 출정하였다. 제갈량의 출정 시기가 늦여름이어서 남쪽 지역은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비에 젖어 길이 진흙탕으로 변하자 이엄은 출정한 제갈량의 군대에 제대로 군량을 보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거짓 보고서를 제갈량에게 보냈다. 오나라 군대가 공격하려고 하니 제갈량에게 철수를 건의한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본 제갈량은 군대를 철수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제갈량이 철수하자 이엄은 황제에게는 “신이 이미 군량을 충분히 준비해서 승상에게 보냈는데 어째서 철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성도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안 제갈량은 이엄을 향해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일을 그르쳤다”고 대노하고 이엄을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제갈량은 이엄을 벌하면서도 그의 가족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아들인 이풍(李豊)을 기용하였다. 그의 아들을 불러 “너의 아버지가 큰 죄를 지었으나 잘 위로해주고 앞으로 잘못을 뉘우치면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엄은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바로 제갈량이 중국의 ‘인정과 법치’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대목이다.

세상의 일을 모두 법만으로 다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제갈량은 법은 질서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이엄은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병들어 자신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