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146-187 중국 상인

Author
ient
Date
2018-01-0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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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basis63@hotmail.com
출처: 평안신문

중국의 빛과 그림자 146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 : “십대 상방(十大商幇)”

사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유태인의 상술’, ‘베니스의 상인’에 관련된 책이나 글을 한번쯤은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중국의 상인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연구되거나 관심을 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에게 중국 상인은 그냥 이전부터 내려오는 ‘비단 장수 왕서방’ 이란 단어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국교수립을 하고 많은 기업가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사업을 하면서 중국인의 상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또 여행을 가서 물건을 사면서 중국 상인들에게 혀를 내두르곤 한다.
도대체 중국의 상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넓은 면적과 각기 다른 생활환경이 이들의 장사에 대한 태도와 전략을 완전히 다르게 생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국의 상인들과 거래를 할 때는 반드시 어떤 지역에서 어떤 사람들과 거래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의 유명한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미 상인의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춘추시기에 월나라의 구천을 도와서 오나라를 멸망시킨 유명한 재상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범려(范蠡)였다. 그는 공자가 유학에서의 성인(聖人)으로 인정받듯이 ‘장사의 성인(商聖)’ 으로 칭송받고 있다. 범려는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재상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시작했다. 그의 장사 원칙은 매우 간결했지만 시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장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생산에 필요한 것을 만족시켜주고, 그 필요성은 다양한 방면에서, 다층적이고 시기와 계절에 따른다. 시기를 파악하고 시장이 필요한 것을 공급하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라는 하면서, 이미 2500년전에 시장을 알고 사업을 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그는 자신이 부자가 된 이후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富好行其德)
이후 오랜 세월동안 중국에는 많은 상인들이 흥망성쇠를 거듭 하였지만 지금까지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고 또 그 후손들이 세계에서 최고의 상인들로 인정받고 있는 몇 개의 상인 집단(중국에서는 이를 商幇이라고 함)이 있다. 크게 보면 5개의 상방이 있고 좀 더 세분하면 10개의 상방으로까지 구분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장사를 하였고 이를 통해 거대한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10개의 상방은 산서진상(山西晋商: 산서성의 진상), 안휘휘상(安徽徽商: 안휘성의 휘상), 섬서진상(陝西秦商: 섬서성의 진상), 복건민상(福建閩商: 복건성의 민상), 광동월상(廣東粤商: 광동성의 월상), 강서감상(江西贛商: 강서성의 감상), 소주소상(蘇州蘇商: 소주의 소상), 영파상(寧波商: 영파의 영파상), 절강절상(浙江商: 절강성 중부의 절상), 산동노상(山東魯商: 산동성의 노상)을 꼽고 있다.
이 10개의 상방이 형성된 것은 주로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를 통해서 형성된 것으로 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재 중국 상인들의 상술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청나라 시기에 해외로 나간 많은 중국인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남양(南洋)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상술로 그 지역의 경제를 장악하였고, 화교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일명 화상(華商: 중국 상인)으로 일컬어지며 중국과 세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본 기고는 중국 상인들의 대표적인 상방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중국인과의 상거래에서 조금이라도 더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에서 성공적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자 한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47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2) : “산시진상(山西晋商:산서성의 진상)의 출현”

산시성은 최근 트래킹으로 각광받고 있는 태항산(太行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태항산맥은 중국의 그랜드캐넌으로 불리고 이 산맥을 중심으로 산시성과 허베이성(河北: 하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이 산동성이다. 또한 북쪽으로는 내몽고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황하와 쌴시성(陝西:섬서성)과 허난(河南省)과 연결되어 있다.
산시성은 중국문명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요순(堯舜)등의 전설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활동했던 지역이고 당나라(唐)를 세운 이세민도 바로 산시성에서 군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 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 문명의 대표적 위치에 놓여있는 산시성은 전형적인 황토 고원지역이다. 약 80%이상이 산악지형이고 대부분 지역의 평균 해발이 1500미터 이상으로 농업이나 기타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태항산맥과 황하에 가로막힌 이 지형적 특징이 바로 중국 최고의 상인들을 만들어내는 근간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시 지역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하려면 이전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베이징(北京)에서 빠른 기차로 3시간이면 수도인 타이위엔(太原)에 도착할 수 있다. 만약 타이위엔을 방문하면 꼭 ‘산시회관(山西會館)’을 방문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산시성은 태항산과 산시 상인, 그리고 ‘국수(麵)’가 유명한데, 산시회관을 방문하면 수백종류의 국수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매 방마다 산시 상인들의 옛 가옥에서 떼내어 온 문짝으로 장식하고 있어 이전의 산시 상인들의 일면을 감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칼국수는 중국말로 ‘따오샤오미엔(刀削麵)’ 이라고 해서 밀가루 반죽을 칼로 깍아서 면을 만들어 먹었다는 데서 유래하고 있다. 그리고 산시 지역은 어디를 가든 각종 모양의 면들을 시식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시성에서 이렇게 유명한 상인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지형적인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황량한 황토고원 지대에 살고 있는 이들은 또한 전쟁이 나면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삶이 그 어느 사람들보다 고난하고 궁핍했다. 이 지역에서 유행하던 노래에는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라는 가사가 담겨 있으니 얼마나 애절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산시성의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만리장성을 만나게 되고 만리장성의 성벽을 나가면 바로 내몽고지역이다. 만리장성의 문을 열고 나간 많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쓸쓸히 사막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 산시성의 사람들의 무덤을 만리장성을 넘어가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산시상인들은 이렇게 열악한 지형을 이겨내고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마침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몽골의 침입을 두려워하였고 변경지대에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여 수비하도록 하였다. 주원장은 네차례에 걸쳐 몽고를 공격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국경지대에 9개의 국경수비 지역을 설정하여 약 320킬로미터의 변방선을 만들고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였다. 이에 동원된 병사의 수는 약 120만명이 넘었고, 말들은 30만 마리 이상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의 정책은 국경수비대가 사용할 막대한 군량이 시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양자강 이남에 수도를 정한 명나라가 양자강을 넘어 이곳까지 양식을 보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의 옛말에 “전쟁의 승리는 양식에 있고, 전쟁의 패배도 양식에 있다”라는 것이 있다. 그만큼 양식이 중요한데 이를 극복할 방법을 산시상인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그것은 바로 ‘소금’이었다. 당시 소금의 전매권을 정부가 가지고 있었으나, 소금 전매권의 일부를 산시상인들에게 주고 대신 양식의 보급을 맡긴 것이다.
명나라의 몽골 침입에 대비한 군대의 파견이 당시 만리장성을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던 산시상인들에게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후 산시상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48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3) : “산시진상(山西晋商)의 발전”

산시상인들, 일명 진상(晋商)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혹독한 생활환경 속에서 강인함이 익숙해 있었다. 이들이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국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무역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특히 강남(江南)지역에서 생산된 차를 운반하여 북쪽의 몽고 지역에 판매하거나 심지어는 러시아의 국경까지 북으로 올라가 차를 판매하였고 대신 그 지역의 특산물을 가져오는 무역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산시상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나는 길은 안문관(雁門關)을 지나서 해발이 점차 높아지며, 좀 더 올라가면 황화령(黃花嶺)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다시 길을 떠나면 이제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한쪽으로 가면 살호구(殺虎口)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길과 또 다른 한쪽 길은 북경에서 가까운 장가구(張家口)를 지나게 된다.
이 두길 모두 몽골초원으로 통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수가 없었다. 여기서 자신들의 운명을 갈라야 했다. 많은 친구와 친척들이 돌아오지 못했지만 먼저 가서 길을 닦은 사람들로 인해 점차 산시상인들이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산시상인들이 강인했던 이유는 이들은 강남이나 기타 지역과는 달리 생명을 담보로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이 흘러 살아남은 사람들로 인해 이 지역 사람들이 차츰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산시상인들이 중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이지만 이미 진시황의 진나라 시기부터 태원(太原), 핑야오(平遙) 등지에 상업도시로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이후 송나라 시기에는 북쪽에서 말을 수입했고 중국은 차와 수공업품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산시상인들은 축적된 자본을 가지고 무역업을 더욱 키워나갔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낙타방(駱駝幇), 선방(船幇), 표호(票号)의 세가지가 산시상인들이 무역하는데 있어서 필수요건이었다.
먼저 낙타방은 물건을 운송하는 그룹을 지칭하며, 이들은 절강, 호남, 강서, 복건, 호북 등의 지역에서 차를 구입한 이후 가공하여 중국의 서북지역이나 몽골, 그리고 러시아 등지로 운반했다. 그리고 선방은 배로 화물을 운송하는 그룹을 지칭한다. 이들은 청나라의 건륭(乾隆)황제 시대에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일본과 동(銅)을 거래하였다.
산시상인들에게서 독특하게 형성된 표호(票号)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식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최초로 산시상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산시상인들이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요건들이었고, 특히 중국식 은행인 표호를 통해 전국의 금융계를 장악하였다. 이후 전국의 51개 표호 중에서 산시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표호는 43개에 달했다. 위의 요소들과 근면성, 그리고 사업하는 정치적 환경이 같이 맞아 떨어지자 이들은 급속하게 부를 축적하였고 중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가게들이나 식당들을 보면 반드시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關羽: 관운장)를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관우의 고향이 산시성이고 또 산시상인들이 관우의 의리를 높게 평가 한 이후 점차 상인들의 신으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관우가 가진 신의와 원칙과 성실함이 산시성 상인들에게도 전해져 내려는데 산시 상인들은 신용을 으뜸으로 여겼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에서의 화목이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자애로움이 재산을 모으는 근본이라고 말한다. 산시상인들이 험난한 역경을 딛고 발전한 배경은 물론 시대적인 요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의 성실함과 신용이 사업의 성공이라고 굳게 믿은 것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49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4) : “산시진상(山西晋商), 중국최초의 민간은행을 만들다”

산시상인들이 성공한 배경은 목숨을 담보로 어려움을 극복하였고, 동시에 이(利)를 중요시 하였으나 그보다는 의(義)를 더 중요시 한 것이 신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중국 최고의 상인이 되게 하였다.
산시성의 수도인 태원(太原)에서 고성으로 유명한 핑야오로 가는 길목에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교가대원(喬家大院:챠오지아따웬)’ 이다. 교가대원은 청나라 최고의 상인집안인 교씨네 저택으로 지금은 영화를 촬영하거나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이 저택은 중국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장예모가 공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던 영화 ‘홍등(紅燈)’의 촬영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이 저택 이름을 딴 TV 연속극도 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교가대원은 6개의 큰 정원과 19개의 작은 정원에 300여개의 방이 있으며, 그림과 조각들이 넘쳐나 얼마나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 지역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가대원 이외에도 ‘왕가대원(王家大院:왕지아따웬)’ 과 유사한 규모의 부유했던 산시상인들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유적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교씨의 성공 스토리는 바로 산시상인들의 성공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중국식 금융의 발원지이고 성공이기도 하였다.
산시상인들은 중국의 남북을 이어주는 국내외 무역에 종사하면서 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돈(당시의 은자)’ 을 어떻게 운반하고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화폐의 기준이던 은(銀)으로 물건을 사고 팔았는데 수백킬로에서 수천킬로에 달하는 이동거리를 안전하게 운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동경로 곳곳에는 이들을 노리는 도적들이 득실거렸고 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표국(票局)’이다. 현대적 개념으로는 경호업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중국의 무협영화에 보면 무예에 뛰어난 사람들이 가마나 수레를 경호하면서 이동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 경호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또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표호(票號)’ 였으며 중국 금융업의 시작이었다. 산시의 고성인 핑야오의 거리에 ‘일승창(日昇昌)’ 이라는 중국 최초의 은행이 등장하였다. 실제 가보면 부지 1400평방미터에 푸른 벽돌과 회색기와로 장식된 건축물 안에서 세계 최초의 어음(銀票)이 발행되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건물안에 몇 개의 방이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 한 방에는 우물 같은 것이 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우물이 아니라 수표와 어음을 발행하면서 대신에 땅을 판 공간안에 은자를 쌓아놓은 곳이었다.
일승창의 시작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일종의 금융계의 혁명과 같은 존재였다. 여기서는 단순히 어음 뿐만 아니라 저금과 대출 그리고 송금 업무도 가능했다. 일승창의 은행업의 시작은 상업계의 새로운 혁신으로 산시상인의 융성을 약속했다.
일승창이 핑야오에 세워진 후 1850년에는 베이징을 포함한 18개의 도시에 지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후 계속 발전하여 전국에 450개의 지사가 설립되었다. 경영 금액이 컸을 때는 약 8억량 이상의 거래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산시의 ‘표호’는 중국을 넘어서 동남아와 일본 그리고 한국에까지 거래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 당시 우편과 교통이 불편한 상황하에서 표호를 만들어 은행업무를 대신함으로서 금융유통업에 활기를 심어주었고, 이를 통해 중국은 새로운 자본시장과 금융시장을 형성하였다. 동시에 산시상인들이 명실상부한 최고의 상인이 되는 순간이도 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0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5) : “관우(關羽)와 산시진상(山西晋商)”

한번쯤은 읽어본 삼국지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인물중에서 ‘의리의 사나이’를 말하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관운장을 추천할 것이다. 관운장 혹은 관우라고 불리는 그는 삼국의 촉한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비(劉備)를 끝까지 보필하였다. 관우가 역사에 있어서 유명해진 이유는 조조(曹操)에 볼모로 잡혀있던 관우가 조조의 금은보화와 모든 회유를 물리치고 의형제인 유비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유비의 군대가 조조에게 대패하여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조조는 자신의 부하인 장료(張遼)를 보내 포위되어 있던 관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관우는 투항의 조건으로 유비의 두 명의 부인을 해치지 않겠다는 것과 자신이 유비의 소식을 알게되면 바로 떠나겠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인재를 아끼던 조조는 할 수 없이 그의 조건을 들어주었다. 관우를 옆에 둔 조조는 금은 보화와 당시에 천리를 간다는 적토마(赤兎馬)도 아낌없이 하사하였다. 관우는 조조가 곤경에 처했을 때 안량과 문추라는 두 적장을 베어버려 그 은혜를 갚았다.
후에 유비의 소식을 접한 관우는 바로 두 형수를 모시고 유비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가는 과정에 조조의 관할이던 5개의 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당시 성을 지키던 조조의 장군들이 그를 막았고 관우는 6명의 장수들을 모두 제거하고 드디어 유비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화는 “관우가 5개의 성을 뚫고 6명의 적장을 제거했다(過五關斬六將)” 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관우가 죽은 후에 그를 의리(義理)와 신의(信義) 의 화신으로 높게 평가하였다.
바로 이 관우의 고향이 산시성(山西省)의 하동(河東: 지금의 運城)이다. 산시상인들은 자신들과 같은 고향인 관우의 신의를 자신들이 장사를 하는데 있어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다. 실제로 관우도 유비를 만나기 전에 역시 장사하던 사람이었고 유비를 따른 이후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중국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상인집단으로 약 10개의 상방(商幇)이 있었으나 그중에 산시상인들의 규모가 가장 크고 또 역사도 500년을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산시상인들의 피속에 관우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녹아져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산시상인들은 관우를 충의(忠義)와 신용(信用)의 상징으로 ‘재물의 신(財神)’ 으로 모셨다. 이것이 이후 지금까지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화교들 중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집이나 가게에서 관우를 모시게 된 배경이 되었다.
산시상인들이 동서남북으로 장사를 하러 다니고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면서 자신들을 서로 연결해줄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 구심점에 바로 재물의 신, 관우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산시상인들이 어떤 지역에서 사업이나 장사를 할 때 자신들의 회관(會館)를 건립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는데 산시상인 회관(晋商 會館)의 가장 중심에 그리고 가장 좋은 건물에 관우의 신전(神殿)을 만들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아예 자신들의 회관의 모양을 ‘관우사당(關羽廟)’의 모습으로 짓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보통 어떤 일을 성공하려고 하면 ‘천지인(天地人)’ 의 세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산시상인은 그 중에 으뜸을 ‘사람(人)’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관계에서의 핵심은 ‘신의(信義)’ 라고 간주했다. 중국어에 이런 말이 있다. “작은 장사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고, 큰 사업을 하는 것은 사람의 덕을 갖추는 것이다. (做小生意是赚钱,做大生意是做人)” 산시상인들은 일찍이 사업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1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6) : “천하의 진상은 한 가족(天下晋商是一家)”

중국에는 산시성 상인들을 빗대어 하는 말이 있다. “무릇 참새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산시상인들이 있다. (凡有麻雀的地方, 就有山西商人)” 이 말은 당시 중국의 대부분 지역에 산시상인들이 퍼져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명청시대를 통틀어 중국의 어떤 다른 상방(商幇)보다 규모도 컸고 또 종사하는 업종도 많았다. 이들은 주로 은행업, 소금, 차, 실크, 면, 식량과 기름, 염료, 철기, 전당포 등 수십개의 업종에서 상업활동을 하였다.
당시 산시상인들은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 모두 퍼져나가 있었으며, 일본과 한국 그리고 동남아 지역에 자신들의 분점을 가지고 있었다. 500년의 역사동안 이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관계(同舟共濟:동주공제)’ 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원칙은 “돈이 있으면 다같이 공평하게 번다” 라는 것으로 혼자서 독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주식회사와 같이 소유와 경영을 철저하게 분리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모두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훈련시킨 직원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직원을 총경리로 임명하고 경영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대신 대주주에게는 총경리들의 경영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의식이 있었다. 매년 설날이 되면 대주주는 전국의 총경리들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때 각 지사의 수익에 따라서 앉는 자리를 정했는데, 가장 수입이 좋은 지사의 총경리를 제일 상석에 앉히고 수익의 순서에 따라 앉게 하였다. 그리고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지사의 총경리는 당연히 말석에 앉게 하였다. 식사가 시작된 후 대주주는 총경리들에게 돌아가면서 술을 권하였다. 그러나 손해를 본 총경리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술도 권하지 않았다. 수입이 부진한 총경리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욕을 먹는 것 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고 그 다음해에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
천하의 산시상인은 모두 한가족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속한 지역의 백성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 특히, 교가대원으로 유명한 교씨(喬氏)가문은 사람들에게 어질기로 유명했다. 청나라 광서(光緖)황제 3년에 대기근이 들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까지 발생했다. 당시 교씨의 가장(家長)이었던 교치용(喬致庸)은 거액을 들여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큰 길가에 죽통을 걸어놓고 기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또한 매일 집 앞에 세 마리의 소를 묶어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소를 끌고 가 농사일을 마치면 저녁때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네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는 치료를 해주고, 가난해서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었다. 또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대신 장례를 행해주었다. 교씨 가문의 선행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상인의 도덕과 사람의 도리의 표본으로 널리 칭송되고 있다.
500년간 번성하던 산시상인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청나라의 국운이 다하자 자신들도 전대미문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청조의 국고가 바닥이 드러나자 산시상인들은 국가를 위해 마다하지 않고 자신들의 재산을 헌신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외국 세력들에게 대항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세계의 열강들은 중국을 쪼개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고 경제적 권리를 독점하기 시작하였다.
산시상인들은 특히,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 정부가 붕괴되자 정부에 대한 채권을 회수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군벌과 일본의 침탈로 대부분의 재산을 잃게 되어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중국인과 중국 상인들은 산시상인이 자신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비록 산시상인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 상인정신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2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7) : “휘주상인(徽州商人:안휘성)의 등장”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가장 강력한 상방(商幇: 상인집단)을 들라고 한다면 산서성의 진상(晋商)과 안휘성(安徽省) 출신의 휘주상인(徽州商人)을 들 수 있다. 휘주는 최근 여행객들에게 환영받고 있는 중국의 안휘성의 남부에 있는 황산(黃山)과 그 일대 지역을 가리킨다.
우선 안휘성을 살펴보면 좌우로 하남성과 강소성, 그리고 호북과 절강을 끼고 있으며 중국 동부의 양자강(揚子江)과 회하(淮河)에 걸쳐있다. 안휘성의 수도는 합비(合肥:허페이)이고 도교문화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로는 바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이 지역 출신이다. 또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관중과 삼국지에서 유비와 손권의 강력한 적수였던 조조(曹操), 관운장을 치료했던 화타(華陀)도 바로 안휘성 사람들이다. 최근의 인물로는 시진핑과 함께 현재 중국의 국무원 총리를 맡고 있는 이극창(李克强:리커창)과 시진핑에게 권력을 물려준 호금도(胡錦濤)도 안휘성 출신이다.
휘주상인은 줄여서 휘상(徽商)이라고도 칭하는데 그 이유는 안휘성 중에서도 휘주지역 출신들이 특히 상업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역사는 산서상인들에게는 못미치지만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휘주 상인들의 고향인 황산 주변은 개간할 토지와 생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 척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주변 환경을 ‘거만산지중(居萬山之中: 산으로 둘러싸여 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휘주상인의 등장과 발전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운하(運河)를 먼저 보아야 한다. 진시황때부터 시작된 대운하 사업은 수나라때 일단 기본적 완성을 하게 된다. 수양제가 심혈을 기울인 대운하 사업은 중국의 남북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고 이후 중국 내륙의 물자를 수송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의 실패와 대운하 사업으로 인한 재정적 파탄으로 짧은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대운하는 지금의 베이징 서쪽에 있는 통주(通州: 베이징 수도 공항과 한국인이 많이 사는 왕경- 望京 중간)에서 항주(杭州)까지 이어지는 총연장길이 1794킬로미터에 달하는 남북을 연결하는 핵심루트였다. 대운하가 관통하는 지역은 항주, 소주, 무석, 진강, 양주, 회안, 서주, 요성, 임청, 덕주, 천진 등으로 모두 당시 경제와 문화의 중심도시로 유명했고 도시 사이의 네트워크 역시 강화되었다.
지금도 중국의 강남 지역에는 운하와 관련한 많은 여행지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소주와 항주는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을 남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실제로 이 강남 지역은 명대 이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대운하가 본격적인 역할을 하면서부터 이다.
징기스칸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도 안휘성 출신인데, 명나라에 와서는 만리장성을 재건하고 북방의 몽고의 침입을 대비하는데 몰두 하였다. 원나라와 명나라 모두는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에서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주로 곡물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운반하는 방식에 있어서 원나라는 바다를 통해서 거둬들인 반면, 명나라는 해금(海禁: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금지)정책을 실시하고 대운하를 이용하였다.
명나라의 대운하를 이용한 정책은 운하주위의 도시들에게 번성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당시 가난에 시달렸던 휘주 사람들은 대거 외지로 진출하게 되었고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대운하가 지나가고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까운 강소성(江蘇省) 북쪽의 회안(淮安)과 양주(揚州) 지역이었다. 특히 양주는 양자강 중류에서 곡물을 탑재한 조운선이 대운하로 갈아타는 교차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고, 회안지역은 조운선에 탑재한 곡물의 양과 수송기한을 점검하는 지역으로 많은 외지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외지인들 속에 바로 척박한 황산지역에서 생계를 위해 고향을 등진 휘주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3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8) : “휘주상인(徽州商人)의 동족(同族) 네트워크”

휘주의 지리적 특징이 이 지역에서 농업을 바탕으로 한 생계유지가 극히 어려웠던 반면, 강남(江南)지역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들은 보다 발전된 강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명나라 후반에는 약 70-90%의 인구가 모두 이쪽으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서울의 강남을 최고의 부유층으로 치지만 당시 중국에서도 강남 지역은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의 하나였다. 당시 강남지역은 소주(蘇州)가 수도인 강소성과 안휘성의 장강(양자강) 이남 지역 및 항주(杭州)가 수도인 절강성 북부를 가리키고 있다. 이 강남 지역은 오늘날도 ‘장강 델타(揚子江 三角洲)’ 지역으로 현재 중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몰려든 휘주상인들을 가리켜 “휘상이 없으면 도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無徽不成鎭)” 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휘주상인들은 장강 하류일대에 수로가 매우 발달되어 물자를 운반하는 것이 상당히 편리하였고 명나라 이후 이 수로를 따라서 도시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고향을 등진 휘주상인들과 산시상인들의 차이점의 하나는 산시상인들은 목숨을 담보로 험한 길을 떠나고 성공하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합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휘주상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주시에 가솔들을 데리고 다니고 심지어는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기도 했다. 객지에서 장사에 성공할 경우 이들은 가솔들을 이끌고 이주한 뒤 그 지역에서 정착하여 귀향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에 장강 지역에서 경제적 발전을 이룬 많은 상인집단이 사실은 휘주상인들이 그 지역에 정착한 후 그 이름을 얻는 경우도 허다했다.
강남 지역을 찾은 휘주상인들은 우선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에 밀집해서 초기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고, 작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업종에 우선적으로 투자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부족한 자본을 채우는 독특한 형식의 지역출신간, 동족간의 배려가 존재했다. 휘주상인들은 특히 족보편찬에 매우 열성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의 조상중 관직에 있었거나 성공했던 이야기를 통해 자랑스러움과 자기 정체성 및 공동체의 단결 의식을 높일 수 있었다. 둘째는 이러한 동족관계를 이용해 인재를 확보하고 상업에 관련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같은 조상을 두고 있다는 의식이 상호간의 신뢰를 높여주고 또한 정보수집의 신뢰성을 높이는데도 크게 작용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간에는 자신의 동족이 송사에 휘말리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무리를 지어 돈을 추렴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집단적 행위를 시도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다른 지역 출신들과의 경쟁이 심해질수록, 각 지역에서의 상업과 관련한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는데, 시장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하거나 판단을 내리고 기후와 상품 생산 상황이 가격에 주는 영향, 운송노동자의 임금, 공급지에서 시장에 이르는 수로와 육로의 교통상황과 안전 여부등의 정보를 얻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정보를 각지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동족인이나 동향인들로부터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족보의 편찬과 사당 혹은 회관의 설립은 이러한 정보수집을 위해 동족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매우 중요시 되었다.
휘주상인들의 독특한 혈연 혹은 지연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부조적 사업형식은 이후 청말 동남아 지역과 미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화교(Overseas Chinese)네트워크’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화교들은 대부분 지연, 혈연, 업연 이라는 3가지 기제를 중심으로 모여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고 여기에 종족회관이나 지역회관이 반드시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지역이나 국가의 이민자들과는 달리 끈끈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이 빠르게 적응하게 도와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4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9) : “휘주상인(徽州商人)의 정경유착”

자신들의 가족과 심지어는 조상의 유골까지 가지고 나온 휘주상인들의 장사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할 만큼 강한 정신력을 소유한 이들은 소금 뿐만 아니라 전당업과 기타 모든 업종에 종사하였다.
명나라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던 산서상인(晋商)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나라 정부가 약해지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개중법(開中法)’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개중법’이란 상인에게 북방 변경의 지정된 장소로 곡물을 운송시킨 대가로 소금의 운송 및 판매권인 ‘염인(鹽引)’을 지급하는 체제를 말하며, 당시 소금이 국가의 중요한 전매품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정부(官)와 민간상인의 거래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말기 국력이 쇠약해진 정부는 전국 각지에 환관들을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다. 이중 ‘노보(魯保)’라는 환관의 행패가 극에 달했고 뇌물을 받아먹고 오히려 소금 시장을 붕괴시켰다. 이러한 환관에 저항하던 산서상인과 섬서상인들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양주 지역이 아닌 사천과 기타 지역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그 기회를 틈타 휘주상인들이 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휘주상인들은 정부관리들의 횡포에 대항하는 방식을 포기하는 대신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면서 소금의 유통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의 ‘정경유착’에 관해 비난하는 사람들은 “휘주상인중에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이 많은데 싸움에 능하고 이기지 않으면 포기하지 않고 권세가에게 아첨도 능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글에서는 휘주상인들을 평가하기를 정부관리와 여자에 대해 편향적이다고 말하고 일생동안 이 두 가지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인색하다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자신들의 가족과 유골까지 데리고 나온 이들에게 치부(致富)가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이 부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정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으며, 실제로 치부하는 방식에서는 첫째 상품유통에 참여하면서 빠르게 정보를 획득하여 시세차익으로 돈을 벌었고, 또 한 가지 방식은 ‘둔적(屯積)’으로 이것은 특정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판매가가 올라갈 때까지 쌓아두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매점매석을 통해 싼 값에 구입해서 비싼 값에 판매하는 형태를 말한다.
드디어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정부인 청나라가 들어서자 기타 지역 출신의 많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휘주상인들은 청나라 정부와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청나라 성립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의 재정이 부족하였는데 바로 이 부족한 재원의 상당부분을 휘주상인들이 공급하였다. 이로서 새로운 통치자인 청조가 전쟁으로 파괴된 회안과 양주 지역을 복구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청조와의 밀접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주도적인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휘주상인들은 일찍부터 정부가 자신들의 사업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들과의 관계에 많은 정성을 들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척중에 재능이 있는 청년들을 관리가 될 수 있도록 공부를 시켜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것이 사대부, 혹은 신사(紳士)의 역할이다. 정부와 민간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들은 위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중간자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주상인들의 지나친 ‘정경유착’이 결국 최후에 가서는 그들의 몰락을 자초하는 또 다른 씨앗을 심어놓게 되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5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0) : “휘상(徽商)과 건륭황제(乾隆皇帝)의 남순(南巡)”

청나라는 누르하치(努爾合赤)가 나라를 세운 이후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 宣統皇帝)에 이르기 까지 모두 12명의 황제가 있었다. 그중 건륭황제는 청나라 여섯 번째 황제이고 베이징으로 청나라가 도읍을 정한 이후 네 번째 황제이다.
그는 25살에 황제에 올라 60년간 최고의 권력을 움켜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그가 황제 재임기간 중에 여섯 번이나 강남 지역을 순시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남순(南巡)이라고 하였다.
건륭황제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康熙帝)도 이미 여섯 차례에 걸쳐 강남 지역을 순시한 적이 있었다. 청나라의 황제들이 이 지역을 순시한 것은 남경에서 건국한 명나라의 반청(反淸)의 정서가 있기도 하였고 또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소금의 경우 전체 중국 생산량의 68%가 이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황제가 이 지역을 순시하여 지역의 민심을 무마하고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당시 모든 신하와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황제의 남쪽 지역으로의 순시는 휘주 상인들에게 있어 최고의 기회이자 또한 도전이기도 했다. 만약 황제의 마음에 든다면 자신들의 사업에 세상에서 둘도 없는 든든한 배경이 생기는 것이지만, 황제의 눈밖에 난다면 곧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건륭황제는 강남을 순시하기 위해 베이징의 자금성을 떠나 산동성 덕주(德州)까지는 육로로 이동하였다. 덕주는 산동성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 대운하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또한 산동성의 북쪽 대문이라고도 일컫는 도시이다. 또한 황하의 하류 지역으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황하가 발해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도시의 특산으로는 ‘파지(배계:扒鷄- 닭요리의 일종)’라고 하는 닭요리가 유명한데 산동요리의 하나이고, 청나라때 황제에 진상되었던 것으로 지금도 덕주를 방문하면 선물로 주고 받고 있다. 이 닭요리는 ‘천하제일계(天下第一鷄: 최고의 닭)’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니 그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맛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건륭황제는 덕주에 도착하면, 이제 배를 타고 대운하를 따라서 강남지역을 향하게 된다. 운하를 타고 내려오다 일단 먼저 머무는 곳이 바로 남경에 가까운 양주(楊洲)이다. 대운하의 모든 물자가 모이는 양주는 황제가 반드시 들리는 곳이었고, 황제가 양주에 도착하면 휘주상인들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황제의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휘주상인들은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비용을 들여 정원을 만들고 길을 고치는 등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황제의 남순과 관련한 대규모 토목사업과 문화사업은 이후 강남의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소주와 항주 등의 아름다운 정원과 건축물들이 바로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강남의 건축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히, 조각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황제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적 향락의 결과이기도 하다.
휘주상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황제와 청나라 관리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대신 강남 일대의 경제권 상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시에 이들은 정부의 권력이 사업을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가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래서 공부를 좋아하는 자식들에게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장사를 잘하는 자식들은 장사를 시켜 돈을 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이유들이 다른 상인들과 달리 휘주 상인들은 유교와 밀접한 상인으로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남순과 지나친 정경유착은 휘주상인에게 몰락의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6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1) : “휘주상인(徽商)의 몰락”

휘주상인들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그들의 실력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양주에서의 소금판매를 맡았던 이들의 자본은 약 5천만냥에 달했는데 청나라 정부의 재정이 가장 많았을 때가 겨우 7천만냥 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 이들의 경제적 실력을 상상할 수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상인은 호설암(胡雪岩)으로 그의 재산은 약 2천만냥에 달해 청나라 재정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호설암의 사업 원칙은 첫째는 좋은 제품, 둘째는 합리적 가격, 셋째는 열정, 넷째는 신용이었다. 호설암이 처음 시작한 사업은 한약방이었고, 자신의 약재 중에서 해를 넘긴 것은 반드시 폐기처분하여 좋은 약재를 사용하도록 하였고 실제로 이를 통해 초기 자본을 형성하여 나중에 큰 돈을 벌게 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점차 소금업과 기타 산업에 손을 대고 정부와의 관계를 유지하여 휘주상인들이 이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휘주상인들에게 예기치 못한 위기들이 닥치고 있었다. 휘주상인들이 생업의 터전으로 삼은 양주는 남경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청나라 말에 바로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의 난’ 이 발생하였다. 당시 아편전쟁 이후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청나라 정부에 반기를 든 홍수전(洪秀全)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농민정권을 남경에 수립하였고 청나라 정부에 대항하였다. 그는 ‘배상제회(拜上帝會: 하나님을 섬기는)’ 라고 해서 자신의 꿈에 성령이 임했고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건설하였고 이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이후 서양 열강이 청나라 정부에 더 많은 이권을 챙겨가는 대신으로 이들을 진압하였고 청나라의 국운은 더욱 쇠락하기 시작했다.
태평천국은 항주에서 북경으로 가는 운하를 점령하였고 운하를 이용해 장사를 하던 휘주상인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청나라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은 다른 지역의 상인들 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몰락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서고 있었다.
또한 휘주상인들의 경영방식에서도 그들의 몰락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편전쟁 이후 시대가 급변함에도 불구하고 휘주상인들은 여전히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고 자신이 축적한 자본을 확대 재생산하지 못했다. 지난날의 가난과 싸우던 근면함과 노력은 없어지고 입신양명과 황제와 정부와의 관계를 위해 막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호화주택과 정원들을 꾸미는데 막대한 자본을 낭비함으로서 자본의 위축을 가져왔다. 실제로 지금도 휘주상인이 활동하던 강남 지역에 가보면 조각과 장식의 정교함에 놀라곤 하는데, 바로 당시의 주택들과 정원들을 꾸미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기업들이 몇 대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 대부분의 경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되면 교만해지고 고집스러워지고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몰락의 이유가 된다. 이런 전형적인 형태의 모습을 보인 것이 바로 휘주상인들이었다.
셋째로 당시 밀물처럼 밀려오는 서양의 새로운 자본주의 형식에 대항할 수 없었다. 기계화되고 저렴한 서양의 제품에 대해 휘주상인들은 여전히 수공업에 의존하는 제품형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중국 시장 자체에서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수백년 동안 전성기를 이루던 휘주상인들의 몰락을 돌이켜 보면 지나친 정부 의존형 기업의 한계와 시대의 변화를 앞서나가지 못했다는 점, 끝으로 초심(初心)을 잃어버리면 그 누구에게나 위기가 닥쳐온다는 좋은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7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2) : “산동성과 산동상인(魯商: 노상)”

산동성(山東省)은 우리와 가장 인접한 중국의 성(省)으로 전체 22개 성(대만 제외) 중의 하나이다. 산동이란 이름은 태행산(太行山)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얻은 이름이고 그 서쪽은 산서성(山西省)이다. 산동성의 수도는 제남(濟南: 지난)으로 교통과 전략적 요충지이고, 일찍이 춘추전국 시기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제노(齊魯)라고도 한다. 그래서 산동 지역의 차량 번호판에는 모두 노(魯)자가 쓰여 있는데 이전의 이름을 사용하여 산동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산동성은 동쪽으로는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연태(煙台), 위해(威海), 청도(靑島), 일조(日照)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황하(黃河)의 하류 지역으로 발해만을 통해 바다로 흘러 나가고 있다. 북쪽으로는 발해만을 두고 요동반도를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황해와 한반도를 마주보고 있다. 또한 그 중심은 항주에서 북경까지 이어지는 대운하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현재도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서 중국의 남쪽 각지를 지나기 위해서는 산동성을 반드시 지나야 하고 북경에서 상해까지의 고속도로도 산동성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다.
산동성은 현재 중국 전체 GDP 3위를 차지하고 있고,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9,580만명으로 중국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성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거의 배에 가깝다. 특히 연해 지역인 청도와 연태, 위해, 일조 등이 인천과 평택 등지에서 카페리가 다니고 있어 한국과는 중국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후부터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청도와 연태 등에 진출하여 기업활동을 하였고 지금도 가장 많은 우리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에서 살고 있는 화교(華僑)의 대부분도 바로 산동사람들이며, 특히 연태와 위해 지역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화교사회를 형성하였다. 신라 시대에 유명했던 해상왕 장보고 역시 산동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만약 위해(威海)에 갈 기회가 있을 경우 장보고 기념관이 있는 법화사를 방문할 수 있다.
우리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산동성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도 유명한 인물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하였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바로 공자(孔子)를 들 수 있다. 유교(儒敎)의 창시자로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유교문화도 바로 산동성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산동성을 방문하면 곳곳에 “유붕자원방래불역열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呼: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표어들을 만날 수 있다. 실제 산동성 사람들은 외국이나 외지의 사람들의 방문을 매우 반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받아 발전시킨 맹자(孟子)도 산동 사람이고, 묵가사상의 창시자인 묵자(墨子)도 춘추시기의 노나라 사람이다. 낚시 바늘 없이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姜太公)과 친구간의 우정의 대명사로 알려진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관중과 포숙아도 산동출신이다. 특히 우리에게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널리 알려진 손무(孫武)와 손빈(孫臏) 역시 이 지역 사람이고, 왕희지(王羲之) 등 수많은 문인들도 배출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많은 장군들과 군인들 중에 산동사람들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는 정직하고 용감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심지어 중국의 군대내에 ‘산동방(山東幇)’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호지(水湖志)의 양산박(梁山泊)의 영웅호걸들이 활동하던 곳도 산동이니, 산동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산동성에는 상인들이나 상업보다는 정치가와 철학자, 예술가 들이 훨씬 더 유명하며, 공자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업보다는 학문과 정부 관리가 되는데 더 비중을 두었다. 훗날 명청시대 이후 산동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 달리 훨씬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독특한 상인 정신을 형성하였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8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3) : “산동상인 – 범려(范蠡)와 자공(子貢)”

산동상인들은 산동성의 긴 역사와 같이 오래되었는데, 주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를 거쳐 송나라때까지 발전하였고 이후 청나라 말기에 완성되었다. 명나라 이전의 산동상인들의 특징은 다른 지역 상인들과는 달리 개별적이고 분산되어 있어 집단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청나라 말기부터 상회(商會)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조직을 갖춘 지역상인 집단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유명했던 제나라의 강태공(姜太公)은 일찍이 국가의 부를 쌓기 위해 교동지역(膠東: 산동의 동쪽 지역)에 비단을 제조하여 무역하도록 하였고, 이때부터 해상 실크로드가 시작되었다. 이 교동지역은 항해 능력이 향상되면서 한반도와 일본 등과의 해외무역이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춘추전국시기인 제나라 시기에 ‘고대 동방 해상실크로드’가 완성되었고 이후 진나라와 당나라, 송나라를 거쳐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이어졌다.
중국 상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범려(范蠡)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의 기록을 빌면 춘추시기 월나라(越)의 정치가로 구천(句踐)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자신은 월나라의 재상직을 버리고 제나라로 건너와 잠깐 재상을 맡았다가 다시 그만 두고 이름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꾸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의 사업의 원칙중 첫째는 시장을 예측하고 기회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필요할 물건이 무엇인지 미리 예측하여 이익을 극대화 하였다. 둘째는 운용자금의 회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사업에서의 자금의 흐름과 유통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셋째는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는 것으로 신용을 으뜸으로 삼았다. 그는 좋은 질의 제품만이 소비자가 구매할 것이고, 성실과 신용이 사업의 장기적인 경쟁력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넷째는 경영관리 방면에서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좋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으며, 다섯째는 부(富)를 축적한 후 사회에 환원하였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 “부유해지고 덕을 베풀었다(富而好行其德)”라고 범려를 칭찬하였다.
범려의 사업방식을 보면 이미 2천년전에 벌써 현대의 기업가나 상인들이 본받아야 할 경영전략과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고 있었다. 특히 최근 우리 기업가에게 요구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상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사회에 대한 기여와 공헌이 없으면 기업이 오랫동안 번영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 유명한 인물이 나오는데 공자의 제자중에 가장 장사에 뛰어났던 이가 바로 자공(子貢)이다. 당시 공자는 자신의 사상인 유교(儒敎)를 전파하기 위해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공자의 ‘주유열국(周遊列國)’이라고 한다. 당시 제자들 중 아무도 그 비용을 댈 수가 없었고 오직 자공만이 장사를 통해 그 비용을 마련했다. 즉, 자공이 없었으면 공자의 ‘주유열국’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 사회의 근간인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상인을 가장 아래로 둔 것을 보면 매우 아이러니 하다고 할 수 있다.
후세사람들은 공자의 제자로 유학(儒學)을 배우고, 유교 정신을 바탕으로 장사를 했던 자공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유교상인(儒敎商人)’ 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자공의 사업 전략은 첫째 사업의 정확한 타이밍을 잡는 것이었고, 둘째는 시장을 예측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판매의 대상을 잘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과 함께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를 바탕으로 자공은 그 당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59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4) : “산동상인과 유교문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479)는 유교(儒敎)의 시조이고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고 교육자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산동성 곡부(曲阜:취푸)로 산동성의 유명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동성을 여행하는 코스중에 태산(泰山)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태산과 곡부를 엮어서 방문하고 있다.
태산은 공자의 고향에서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곳에 있고 중국의 유명한 ‘5개의 산’(五岳: 태산, 형산, 화산, 항산, 숭산)중의 으뜸으로 여겨진다. 태산의 높이가 비록 다른 산에 비해 높지 않으나 황제가 되면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황제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한편, 공자의 유교사상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사람됨의 기본으로 강조하였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유교사상은 한나라(漢) 이후 전제군주제도하의 중국에서 수천년동안 중국을 유지하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해왔다. 비록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었으나 다시금 중국의 지도자들은 공자의 유교가 현재 중국 사회의 불안정성을 해결해줄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유교와 중국의 전통문화를 강조하고 있다.
공자가 말했던 덕목에서 ‘신(信)’은 바로 신용을 의미하며, 이 신용이 산동성 사람들과 상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신용과 함께 강조되었던 것이 바로 ‘의(義:올바름)’인데 공자는 이를 사람됨의 가장 기본으로 삼았고,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라(見利思義)”라고 가르쳤다.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받았던 맹자(孟子)도 “덕이 근본이고 의로움이 우선이다. 의로움으로 이익을 취하라(以德爲本, 以義爲先, 以義致利)” 라고 하였다.
산동상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유교문화가 다른 어떤 지역의 상인들 보다 많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산동상인들은 “이익을 구하지만 재물에 욕심은 내지 않는다(求利不貪財)” 의 전통이 남아있어 그들의 상업활동에 있어서 ‘도의(道義)’를 가장 우선 순위에 놓곤 한다. 이러한 전통이 오히려 산동상인들이 성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베이징에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많은 식당들의 주인이 산동 상인들로부터 시작된 곳이 대부분이다. 또한 포목점이나 기타 많은 잡화들을 다루는 가게들은 작은 눈속임을 하지 않고 정직과 성실함으로 손님들을 대했기 때문에 고객들의 환영을 받았고 오랜 기간 동안 번성할 수 있었다.
또 산동상인들은 고난과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독일 학자는 산동사람들 보다 뛰어난 광부나 철도 노동자들을 본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난을 잘 견뎌냈다. 이러한 정신은 많은 산동사람들로 하여금 중국 동북쪽의 황량한 지역으로 이주를 가서 그 지역을 개발하였고 논과 밭을 일구었다. 산동사람들은 지금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만리장성의 밖의 동북쪽을 개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일본이 중국의 만주와 동북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때도 산동사람들은 어려운 역경속에서 서로를 도와가며 견뎌냈다. 일본의 상인과 러시아 상인들이 동북지역의 상권을 점령하고 있음에도 동북지역에서 큰 상권의 하나로 발전시켰다. 심지어는 러시아의 시베리아까지 진출해서 산동상인들은 산동사람이라는 강한 유대감과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이 지역에서 ‘패하지 않는 상인’ 이라는 별명으로 사업에 성공하였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0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15) : “산동상인의 발전과 특징”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형성된 산동상인은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산동상인들은 사업이나 장사를 할 때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못하고 동시에 친구에게 미안한 행위를 하지 못한다. 산동사람들은 그만큼 친구를 중요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산동성에서 사업을 할 때 우선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역시 ‘정직과 신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친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정직과 신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산동사람들과 사업을 할 때 술이 없으면 대화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산동사람들은 친구가 오면 반드시 술대접을 해야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산동상인들은 특히 우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 손해보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산동상인들과 거래를 할 때 급하게 사업얘기를 먼저 꺼내서 서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시에 상대방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속이려고 하거나 하면 바로 정색을 하고 거래를 중지해 버린다.
산동상인의 또 다른 특징은 고생을 잘 견딘다. 그러나 모험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산동사람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모험정신이 비교적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곤 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산동상인들은 산시상인들이나 휘주상인처럼 중국전체에서 큰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고 주로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을 장악했다. 이 지역에서 산동상인들은 처음에는 행상으로 시작을 해서 사업의 규모를 키워갔는데 자신의 집에서 짠 면직물들을 가지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수십만명 이상의 산동출신의 상인들이 행상을 시작했고 이때 자신들의 식솔들을 데리고 가지는 않았다. 이들은 돈을 벌면 바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타지에서의 행상이 쉽지 않았던 이들은 함께 돈을 모아 각지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을 건립하고 같은 고향이나 혈연관계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돕고 상호간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바로 이 회관을 중심으로 산동상인이 형성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이전에 수도로 삼았던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으로 많은 산동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남쪽의 비단 등을 이 지역에 판매하는 중간상인의 역할을 담당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또 더 북쪽으로 진출한 산동사람들은 지금의 흑룡강성과 백두산이 있는 길림성으로 들어가 황무지를 개척하고 자리를 잡고 경제권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이 동북지역의 제일 끝에는 러시아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국경무역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하여 철도건설과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청나라 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산동상인들은 동북지역과 만주지역에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통상업에서 수공업을 기초로하여 금융업과 해운업등에 종사하여 큰 돈을 벌었다.
산동상인들의 발전과 그 한계에 대한 많은 논의들은 유교사상을 비켜갈 수가 없다. 친구를 중요시하고 의리와 예절을 중요시하는 이 전통은 지금도 남아있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를 중요시하고 소인은 이익을 중요시한다” 라는 말처럼 산동사람들과 성공적인 사업을 하기위해서는 내가 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1 : 중국 상인
섬서 상인(16) : 3000년의 고도 시안(西安:Xian)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손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시안이 으뜸을 차지한다. 중화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80만년전의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0년 중국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안이라고 할 만큼 오랜 역사와 많은 문물들이 남아있다.
우리에게 시안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한국 최고의 기업인 삼성이 시안에 약 7조3000억원을 투입하여 반도체공장을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삼성은 시안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중국의 내수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이 지역에 진출했고, 시안은 지금 한국 바람이 불고 있다.
시안은 섬서성(陝西省)의 수도인데, 섬서성은 중국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하강과 양자강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중국내의 산서, 하남, 호북, 사천, 감숙, 녕하, 내몽고, 중경 등이 맞닿아 있어 다른 성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고 있는 성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주나라에서 시작하여 한나라 당나라까지 13개의 왕조가 이를 도읍으로 정했던 가장 많은 왕조의 중심지였다. 특히, 전국시대를 끝내고 최초의 통일 중국을 이루었던 진나라의 수도였고, 항우와 유방과의 처절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많은 문화 유적지를 탐방할 수 있어 세계 각국의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시안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가장 으뜸 되는 곳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병마용은 1974년 시안 외곽 마을에서 우연히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도 불리우는 이 거대한 진시황의 무덤안에는 살아있는 듯한 표정을 지닌 당시의 병사들이 거의 실물 크기로 포진하고 있었다. 지금 방문해서 보아도 정말 2000년 이전에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시내쪽에서 멀지않은 곳에 또 하나의 유적지가 있다. 중국의 4대미녀의 하나였던 양귀비(楊貴妃)가 목욕을 했다는 화청지(華淸池)가 자리 잡고 있는데 여행객 중에는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상상을 해보는 엉큼함도 있을 수 있다. 중국의 4대 미녀는 서시, 왕소군, 초선, 그리고 양귀비를 가리키는데 양귀비의 치명적인 매력이 꽃이름에서도 양귀비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유혹적이었는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양귀비는 이후 당나라 현종때 안녹산의 난을 피해 도주하다가 현종의 호위병사들의 요구로 38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역사에 역사를 덧칠하기를 거듭하고 있는 이 시안에는 또 하나 가볼만한 곳이 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면 대안탑(大雁塔)을 만날 수 있다. 모두 7층의 높이로 약 64미터에 달하는데, 이 탑은 바로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을 데리고 천축국을 다녀온 현장(삼장법사)과 관련이 되어 있다.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여기에 넣고 보관하였다는 곳이다.
중국 3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안은 세계사적으로는 중국과 세계를 이어주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이른바 비단길로 일컬어지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바로 시안이었고 또 차마고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고대 지구상에서 로마와 함께 가장 번성했던 도시 시안은 중국의 산서상인, 휘주상인과 함께 섬서성 상인집단의 주요 활동무대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2 : 중국 상인
섬서 상인(17) : 실크로드(Silk Road)와 차마고도(茶馬古道)

2013년 9월 중국의 국가주석인 시진핑이 카자흐스탄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하였다. 그 내용중에 인구 30억명을 포괄하는 새로운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구축할 것을 발표하였고 이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새로운 실크로드의 길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육로를 통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바다를 통하는 길이다. 특히 육로의 경우 바로 시안에서 출발하여 중국내의 서쪽 지역인 우루무치를 경유하고,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경계에 있는 이스탄불을 지나 유럽까지 이어지는 루트이다. 지금 시진핑이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실크로드는 바로 중국의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때 시작되었던 고대 실크로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고대의 실크로드는 시안을 지나 중앙아시아 이란 등을 통과하였고, 이것은 단순한 ‘길’의 개념을 벗어나 중국과 유럽 대륙 및 통과하는 지역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연결해주는 통로였다.
중국의 제5세대 지도자인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강조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주장하고 여기에 맞는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바로 그 출발점이 시안이다. 한나라부터 시작된 실크로드는 당나라때 전성기를 맞이했고, 당시 서양으로부터 많은 문물들이 중국으로 들어오고 중국의 물건들이 이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상호간에 교역이 있어왔다.
당나라 시기(589-896)에 서안에 정착하며 무역을 하던 서역으로부터 온 상인들의 수가 만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 이들은 주로 낙타를 운반수단으로 하는 대상(상인집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중국의 도자기, 비단을 가득 싣고 끝없는 사막의 길에 들어섰다. 반면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부터는 포도, 호두, 후추, 시금치, 오이, 석류 등이 들어왔다. 특히 석류의 경우 이란으로부터 들어왔는데 중국의 시안에 가면 많은 석류를 볼 수 있다.
시안을 기점으로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을 지나 서쪽으로 유럽까지 이어지던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한다면, 남쪽과 연결되는 또 다른 무역 루트가 있었으니 바로 ‘차마고도’이다. ‘차마고도’ 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바꾸는 무역이었고 그 길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차마고도는 해발 고도 4000미터 이상의 높은 고원지역과 험난한 길을 넘어서 이루어진 무역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을 만큼의 불가사의한 무역 루트이다.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무역에서 처음으로 관여한 사람들이 바로 섬서상인들의 조상들이다. 섬서상인들은 명나라 이후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수천년전에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차마고도에서의 한족과 티베트족과의 무역에서 섬서성 사람들은 티벳인들이 많이 사는 사천쪽으로 이주해 차마고도를 만들었다.
중국의 차가 서역으로 더 많이 확산되는 계기를 중국의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결혼한데서 찾기도 한다. 당나라의 태종때 문성공주는 시안에서 티벳까지 약 3000킬로미터의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길이 바로 차마고도와 함께 연결되는 길이기도 하다.
고대 시안을 중심으로 하는 섬서지방은 한나라와 당나라를 지나면서 왕조들이 몰락하였고 이 지역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중원에서의 끊임없는 전쟁과 이민족의 침입 속에 실크로드와 차마고도는 점차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기 시작했다.
이후 시안과 섬서성 사람들은 고대의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황토고원 지대에서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어려운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중에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이들에게 또 한번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3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18) : 섬서상인의 재기


실크로드가 끊어진 이후 시안을 중심으로 하는 섬서성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국의 중심에서 멀어져 갔다. 당나라 이후 세워진 송나라는 수도를 시안(西安)에서 개봉(開封)으로 옮겨갔고, 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만리장성과 가까운 베이징에 수도를 정했다. 이후 난징(南京)에서 시작했던 명나라는 북방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베이징을 계속 수도로 삼았고,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흥성해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역시 베이징에 자리를 잡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시안은 오랜 역사동안 잊혀져 있었고, 섬서성의 사람들도 척박한 땅을 일구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또 한번 이들에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바로 명나라가 몽고의 침입을 막기위해 섬서성 북쪽의 서북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기 시작하면서였다. 이들은 이후 산시(山西)상인들과 유사하게 군대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섬서상인들이 주로 종사했던 업종은 소금사업이었다. 특히 쓰촨(四川)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주로 다루었고, 이외에도 포목, 물담배, 가죽, 약재, 차, 전당포 등의 업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초기에 자본축적을 시작한 것은 소금이 아니라 포목 사업이었다. 명나라 시기의 서북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은 추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의복을 섬서성에서 공급받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목의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하자 섬서상인들은 강남쪽에서 포목을 구입해 운반해서 판매했고 이를 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난(河南)지역에서 면화를 공급받아 판매를 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섬서상인들을 일컬어 ‘면화방(棉花幇)’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들은 허난성 이외에도 남쪽 지역에 있는 후베이(湖北) 지역의 면화도 구입해 서북 전체의 포목과 면화 사업을 독점하였다. 섬서상인들이 어느정도 자본이 축적되자 다음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소금사업’이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기간동안 많은 사업중에서 이윤이 가장 많은 남는 것이 ‘소금사업’이었기 때문에 산시상인과 휘주상인이 몰려있던 강남의 양주(楊洲)까지 진출하기 시작했다.
강남지역으로 진출한 섬서상인들은 빠르게 적응해갔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산서상인들과 겨룰수 있을 만큼 자본을 확장해갔다. 이들은 쓰촨의 ‘소금사업’을 독점하고 난 이후에 강남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에 쓰촨의 ‘소금사업’은 여전히 섬서상인들의 손에 있었다.
섬서상인들이 손댄 또 하나의 사업은 ‘물담배’였다. 당시에 물담배가 유행했는데 특히 난주(蘭州)에서 생산되는 담배가 주종을 이루었다. 섬서성의 통조우(同州) 상인들이 이를 취급하였고 이들은 사장에서부터 사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원을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고향사람들을 고용하여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여기에 끼여들지 못했다.
섬서상인과 산시상인(山西)의 유사한 점은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살다가 기회가 오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공했다는 것이고, 동시에 이들이 경영을 하는데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즉 친척이나 최소한 같은 동향 사람들을 고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에서의 원칙은 이후 중국의 다른 상인들에게도 전파되어 외지에 나가면 회관(會館)을 짓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타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점차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섬서상인들은 이제 또 다른 사업의 영역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시작했고 중국의 10대 상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4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19) : 섬서상인의 발전

섬서상인들이 다시금 재기에 성공한 것은 명나라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킨 후몽고족이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해 국경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초기에 자본을 축적한 것은 군대에서 필요한 의복을 제공했고 또 이를 통해 소금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뿐만 아니라 섬서 지역의 특징상 많은 약재가 생산되었는데 전국의 약재를 통제할 수 있었고 동시에 국경에서의 ‘차’무역에도 종사하였다. 많은 약재 중에서 특히 섬서성에서 생산되는 대황(大黃)은 당시에 매우 귀한 약재였다. 이 대황은 현재도 약용으로 많이 사용되며 변비와 항염 등 각종 질병에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중국의 복건성이나 동남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이 약재가 귀했기 때문에 섬서성에서 구해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모든 한약재에 꼭 들어간다는 감초(甘草)는 원래 감숙성(甘肅省: 깐수성)의 중부에 위치한 감초라고 하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이전의 실크로드에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섬서상인들이 이 지역에 모여들어 감초를 수매하여 전국에 유통시켰다.
그래서 전국의 한약재를 판매하는 대부분은 섬서상인들이었고, 또한 이들은 단순히 약재를 판매할 뿐만 아니라 조제에도 능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중국의 최대의 약재(藥材) 시장은 안휘성의 중부지역에 위치하였고, 지금도 중국 최대의 약재시장으로 불리운다. 바로 이곳에서 섬서상인들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 한가지 이들이 치부(致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차마교역(茶馬交易)’이었다. 명나라 시기에는 차(茶)도 소금과 같이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다. 당시 주위의 유목민족들은 일명 치즈를 만들어 먹었는데 만약 차를 함께 마시지 않으면 쉽게 병에 걸렸다. 그래서 이들은 국경지역에서 차를 얻기 위해 말을 끌고가 바꾸기 시작했다. 여기서 차와 말을 교환하는 국경무역이 시작되었고 그때 사용되던 길이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차마고도(茶馬古道)’이다.
섬서상인들이 서북과 서남지역의 차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섬서성이 당나라시기부터 전국의 7대 차 생산지로 알려져 있고, 중국의 차와 관련한 첫 번째 책인 ‘다경(茶經)’에서 말하는 ‘산남차(山南茶)’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우리가 삼국지에서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차(茶)를 사러 시장에 나왔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을 기억하듯이 차는 중국인에게 꼭 필요한 음료이기도 하였지만, 유목민족에게도 필수적인 음료였다.
당시 서북지역과 서남지역에서 필요했던 모든 차의 무역을 섬서상인들이 담당했으니 그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섬서성에서 생산되던 차만으로는 공급이 부족하자 섬서상인들은 인근 지역인 쓰촨성(四川)에서 생산되던 차도 자신들이 운반해서 판매를 하였다. 당시 주요 구입자들은 티베트 지역과 청해성 등에 거주하던 티베트족들이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양이나 말젖에 차를 타서 함께 마시고 있다.
약재와 차를 제외하고도 소금판매, 식량, 그리고 초기에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던 포목업 등에 종사했던 섬서상인들은 이윤이 높은 고리대금까지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였다. 고리대금을 받는 전당포의 경우 청나라 초기에 섬서지역에서만 약 800개의 점포가 생겨났다. 이후 이들은 세력을 더욱 키워 쓰촨성까지 그 세력을 넓혀갔으며 ‘섬방(陝幇: 섬서상인 집단을 일컫는 말)’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5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0) : 섬서상인의 몰락과 부흥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중국상인으로는 산시상인과 휘주상인 다음으로 섬서상인을 이야기 한다. 시안을 중심으로 하는 섬서지역은 송나라 이후 중국의 경제가 남쪽으로 옮겨가면서 한나라와 당나라때의 영화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건국된 후 다시 기회가 찾아왔고 소금판매업과 차마교역, 면직물의 판매등을 통해 다시금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섬서상인들은 자신의 지리적인 특색을 충분히 활용하여 서부지역과 내륙지역의 무역을 독점함으로서 그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섬서상인들이 이 지역에서 독특한 경제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원래 한나라와 당나라의 수천년 동안의 경제적 번영과 상인계층의 오랜 경험들이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놓치지 않고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사회가 매우 불안하였으며 또 다른 이민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어 도적들이 횡행하는 지역이었다. 섬서상인을 가리켜 ‘一大二土(일대이토)’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첫째는 이들의 자본이 대단했다는 뜻이고 둘째는 많은 돈을 벌어도 주거하는 집이나 생활방면에서 굉장히 검소했다는 뜻이다.
명나라의 200년 동안 이들은 사천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무역과 금융을 모두 통제할 만큼 세력이 커졌고, 북쪽의 몽고지역의 경제도 장악했다. 청나라 시기에는 소금, 차, 면직물, 담배, 나무, 약, 가죽, 금융 등의 많은 영역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서쪽의 우루무치와 이리에서 남쪽의 광동성과 상하이까지 그 실력을 뻗쳐 명실상부한 대상인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당시 세력은 전국에 245개의 섬서상인 회관을 건립하였고 이 회관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익을 유지했다.
그러나 청나라 후반에 오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섬서상인들이 산시상인이나 휘주상인에 비해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소금업이 쇠락하면서 휘주상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고, 산시상인들이 사천성과 섬서성으로 들어오면서 이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또한 차 무역에 있어서도 당시 베이징에서 파견된 좌종당(左宗棠)이 세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이 직접 무역을 담당하면서 차 무역시장에서도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서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이다. 서양의 값싼 면직물들이 들어오면서 기전에 섬서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면직물 시장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고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담배 역시 서양인들이 기계로 대량생산을 하면서 이 지역에 값싼 담배가 밀려왔고 130개의 담배 공장이 결국은 10여개만 남았다.
그리고 청말이 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이 지역의 위구르 족 등이 폭동을 일으키고 섬서상인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수백년 동안 모아왔던 모든 재산들이 사라져 버렸다. 섬서상인들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상실되었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섬서지역이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하고 있다. 바로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서부대개발’ 정책이다. 서안을 중심으로 다시 서부지역을 개발한다는 중국의 정책과 새로운 실크로드 정책으로 섬서지역이 다시 역사의 중앙에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6 :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1) : 광동성(廣東省)의 역사적 지위

광동성의 수도는 광조우(廣州)이고 중국 대륙의 남쪽 연해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한동안 우리에게 쇼핑의 천국으로 각광받았던 홍콩과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마카오도 광동성에 속해있었다. 광동성은 중국의 근현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성이기도 하다.
‘중화(中華)’는 ‘가운데서 빛난다’라는 의미로 세상의 중심이란 뜻이며, 또 당시 중국은 자신들을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천하(天下)’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가장 중심에서 빛난다’고 믿고 있던 중국은 서구 열강의 군함과 대포에 힘없이 무너졌다.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국가였던 영국은 중국과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이후 중국은 서구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과 영국은 ‘남경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때 정식으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동시에 광조우 등 5개의 항구를 개방하였고, 미국과 프랑스도 연이어 중국으로부터 무역에 있어서의 특혜를 요구하였다. 이후 영국은 홍콩섬만이 아니라 구룡반도(九龍半島)와 신계(新界) 지역까지도 차지하였다.
결국 중국은 영국에게 홍콩을 조차하고, 또 포르투갈에게는 마카오를 조차하였다. 이후 1997년과 1999년이 되어서야 다시 중국의 특별행정구역으로 반환받았으니 거의 150년 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 기간 동안 홍콩과 마카오는 정치와 경제체제에 있어서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체제하에서 존재해왔다. 지금 이 두 지역은 특별행정구라는 이름으로 50년간 지금의 체제를 존속시키기로 약속되어있다.
광동성은 진(秦)나라 이후 남월(南越)족을 중심으로 농업에 종사해왔고,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농업을 상품화한 지역이다. 동시에 중국이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접촉 창구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자본주의가 수입되고 발전한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이 덩샤오핑의 주도하에 개혁과 개방을 했을 때도 4개의 경제특구 가운데 3곳이 광동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선쩐(深圳:심천)도 경제특구의 하나이다.
선쩐은 원래 인구가 2만명 밖에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홍콩과 인접한 이곳을 개방해서 세계의 자본이 들어오도록 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 경제를 발전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선쩐은 홍콩과 맞닿아 있는 중국의 광동성으로 들어가는 창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홍콩에서 전철을 타고 종점에 내리면 여기서 선쩐으로 들어가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건물이 나온다. 여행객들은 한 건물안에서 홍콩의 출국수속과 중국의 입국수속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수속을 마치고 나오면 선쩐의 번화가로 바로 나올 수 있다.
개혁 개방 이후 10년도 되지 않은 1987년 광동성은 중국 공업생산량의 79.6%를 차지할 만큼 규모가 커졌고 식품, 기계, 화학, 방직 등이 광동성의 중요한 산업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광동성의 국내총생산액은 중국의 30개 성에서 계속해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중국 최고의 경제지역이다. 현재 전국 경제의 15%를 차지하고 있으며 홍콩과 대만을 능가하여 중국 경제와 금융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 되었다.
이 광동성의 수도인 광조우는 진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대외무역에서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는 중국이 동남아 지역과 기타 해외와의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이 도시는 청나라 말기 혁명의 본산지이기도 하였다.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건립한 손문(孫文)도 광조우를 중심으로 혁명을 시작하였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7: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2) : 광동 사람들의 특징

광동성은 바다를 접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외국과의 교류가 가장 빈번했던 지역으로 해양문화의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교류는 광동 사람들로 하여금 외국문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물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특징을 가지게 하였다.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임어당(林語堂)은 광동사람들을 일컬어 “광동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남자이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거친 풍랑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서로 단결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이 광동사람들을 그 어느 지역보다 서로 단결이 잘되도록 하였고 외국에 나가서도 잘 뭉쳤고 서로 도왔기 때문에 빠르게 성공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미국의 차이나 타운에 가서 중국인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생활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베이징의 표준어가 아니라 광동어이다. 이들은 일명 화교(華僑)라고 불려지며 동남아와 미국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특히, 동남아 지역의 경제권은 모두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 광동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사실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광동사람들을 구성하고 있다. 첫째는 ‘광부인(廣府人)’이라고 해서 가장 전형적인 광동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수도인 광조우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개방적이며 새로운 사물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또한 경제관념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며 창조력이 뛰어나고 변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특징이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후 가장 빠르게 부를 축적하게 하였다. 이들의 또 한가지 특징은 아침에 차를 마시는 것을 특히 좋아해서 광조우에 가면 아침에 차와 음식을 함께 파는 식당들이 줄이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조산인(潮汕人)’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漢)나라 이후 인접하고 있는 복건성과 중원의 각지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다시 홍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홍콩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조산인들이다. 이들은 무역의 중개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쌀, 약재, 도자기, 차 등을 무역하였고 아시아 최고의 갑부로 알려진 리쟈청(李嘉誠)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출신 지역에 대한 동질감이 굉장히 강하며 세계 각지의 화교사회에서 회관, 상회, 동향회등을 통해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무역 형태를 보면 모두 같은 지역간 혹은 혈연관계간의 거래가 지배적인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객가인(客家人)‘이다. 객가라는 말 그대로 손님이라는 뜻인데 중국의 역사속에서 수나라와 당나라 이후 전란을 피해 남으로 이주해서 중국의 남쪽 지역 곳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다. 그 인구가 약 4천500만명이 넘으며, 그중 해외로 이주해 나간 사람들만 400만명이 넘는다. 특히, 중국 개방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심천 지역의 50% 이상이 모두 객가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객가어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한자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우리말의 받침소리와 같아 우리가 발음하는 한자와 유사한 단어들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광동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장사를 잘한다는 것이다. 중국말에 “북경 사람들은 모두 정치가이고, 광동 사람들은 모두가 뛰어난 사업가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들은 현재 중국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8: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3) : 광동상인의 중국 해상무역 장악


중국의 광동(廣東) 상인들은 영남(嶺南)지역에서 시작하여 홍콩과 마카오 등으로 발전해나갔다. 이들은 기업을 설립하고 시장에서의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상인집단으로 알려져있다. 광동성의 지역적 특징인 연해지역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연해 지역 및 해외무역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왔다. 특히 이들은 청나라 말기 외국과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중국 정부가 허용한 ‘十三行(십삼행)’을 중심으로 해외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그 전통이 지금도 내려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 되었다.
중국의 지도를 보면 광동성은 남중국해를 바라보면서 길게 뻗어있고 중앙 정부와 거리가 멀어 폐쇄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외래문화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해외무역은 한나라 시기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남중국해를 거쳐, 말라카 해협과 페르시아만에서 아프리카 동부 지역까지 무역루트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해상을 통한 무역루트가 바로 과거의 ‘해상실크로드’였고, 지금 시진핑이 주장하는 ‘해상실크로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 바닷길을 통한 무역은 육지를 통한 실크로드에 비해 훨씬 힘들었고 위험도 많았으나 선박에 실을 수 있는 양이 많았기 때문에 이익이 높았다. 그래서 더 많은 광동상인들이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청나라 정부시기였던 1757년부터 정부는 자신이 지정한 ‘十三行(십삼행)’ 만이 외국과의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독점권을 주었고 이들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해외무역을 독점한 이들은 1840년의 아편전쟁과 이로 인해 중국이 영국과 체결한 ‘남경조약’을 맺은 1842년까지 약 85년간 중국의 해외무역을 독점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남경조약 이후 중국의 많은 연해지역이 통상항구로 지정되었으나 광조우의 상업과 문화의 개방정도가 가장 뛰어났으며 외국과의 무역 및 문화 등을 중국내로 유입하고 서양과 만나는 교차지 역할을 담당했다.
초기 광동상인들은 단순히 영국이나 스페인, 프랑스 등의 외국 상인들을 도와 상품을 운반하거나 내륙으로 판매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상업적 두뇌를 가지고 있던 광동상인들은 점차 자신들이 창업을 하고 자신들이 직접 기업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양의 제품들을 중국의 내지에 판매를 하는 동시에 중국의 도자기와 차 등을 해외에 판매하는 전형적인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부를 쌓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동회관(廣東會館)’의 기능을 빼놓을 수 없다. 광동회관은 청나라 시기에서 중화민국 초기까지 무역활동이 내륙까지 확대되고 해외로 진출하면서 ‘광동회관’은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해외 각국에도 설립되었다. 광동회관은 베이징, 상하이, 장쑤, 쓰촨, 광시 지역에 숫자가 제일 많았고 기타 지역인 푸젠, 산동, 동베이, 안휘 등 전국에 없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해외에는 아시아, 미주, 호주,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 설립되었다.
광동회관은 베이징에만 40개가 설립되었고 쓰촨에는 300개가 넘었다. 싱가폴과 말레이시아에 70개, 그리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만 8개가 설립되었으니 그들의 영향력을 상상할 수 있다. 이 회관의 설립은 모두 광동상인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만들어졌고, 회관이 설립된 후에는 광동상인들의 무역활동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회관을 통해 광동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그들이 활동하는 지역의 정치, 문화, 사회에 영향력을 미쳤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69: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4) : 광동상인의 발전모델

광동상인은 월상(粤商)으로도 불리며, 산서성의 진상(晋商), 안휘성의 휘상(徽商), 절강성의 절상(浙商)과 함께 중국 ‘4대 상인집단(四大商幇)’의 하나이다. 산서상인과 안휘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정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였다. 특히 정부로부터 소금업의 독점권을 얻어 시세차익을 챙겼다. 반면에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광동은 중국의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山高皇帝遠)”라는 속담처럼 정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남다른 통찰력과 장사수단으로 많은 이윤을 남겼고,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성공을 이루었다.
광동상인은 지역과 사람들에 따라서 조주방(潮州幇), 광주방(廣州幇), 객가방(客家幇)으로 세분할 수 있다. 광동상인들은 중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위에 서양의 상업모델을 수용하여 독특한 자신들의 상업모델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중국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들인 영안공사(永安公司), 신신공사(新新公司), 대신공사(大新公司)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조주방은 상업에 뛰어났고 세력도 강하여 전국적으로 그 세력을 넓혀 나갔다. 홍콩, 마카오와 동남아 지역과 전세계의 많은 화교상인들이 이 지역 출신이다. 지금도 중국의 보석, 음향, 전자제품, 소상품 및 완구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광동성내의 많은 도매상과 소매상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광동상인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다른 지역의 상인보다 모험정신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위험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멀리 있는 중앙정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독립정신이 강하였다. 이러한 정신의 정치적인 표현으로 청나라 정부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손문도 광동 출신이라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명나라 초기에 해금(海禁 : 바다로 못나가게 막는 정책)에 대항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물건을 구매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을 제공하여 한편이 되어 수출을 하였고, 또한 해외로부터 물건을 구매하였는데 이때 이익이 약 10배에 달했다. 청나라 시기에는 정부의 명을 듣지 않는 밀수 형식으로 이를 유지했고 중국과 해외의 무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둘째 특징은 혈연(血緣)과 지연(地緣)과 업종을 연결하는 유대감이 다른 지역보다 특히 강했다. 그중 혈연적 유대감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였다. 해상무역은 위험도 많을 뿐만 아니라 많은 투자가 요구되었다. 이들은 혈연의 연장선상에서 친척들간에 배를 만들고 물건을 싣고 바다로 나가 해상무역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들의 혈연과 종족의 유대가 특히 강했던 이유는 이들 대부분의 선조들이 중원에서 환란을 피해 광동으로 집단적으로 피난왔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강한 단결력과 상호협력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이들은 가족의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결합하는 수단으로 상회(商會)를 이용했고 이를 통해 현재적인 사회적 자본으로 변화되어 경제적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지금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서양사상을 흡수하고 서양모델을 수용하는 빠른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근대화의 선두에 섰던 강유위(康有爲)와 손문이 대표적 인물이다. 광동상인들은 동남아와 미국 그리고 호주 등으로 뻗어나가 현재 해외 화교가 약 3000만명에 달하고 그중 광동상인들이 70%에 달한다. 그래서 청나라 시기에 ‘태양은 영원히 광동인들에게 비춘다(太陽永遠普照着粤人社會)’라는 말이 있었다.
광동상인들은 지금도 중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상인집단으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중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0: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5) : 광동상인의 강점과 약점

중국은 1979년 덩샤오핑이 개혁과 개방을 실시하면서 홍콩과 가까운 심천(深圳), 마카오와 가까운 주해(珠海), 화교가 많은 산두(汕頭), 그리고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하문(厦門) 등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고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였다. 이 4개의 경제특구 중 3개가 모두 광동성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광동지역이 해외와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광동지역에서는 북방 지역과는 달리 곳곳에 덩샤오핑의 사진과 글이 담겨진 포스터와 광고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해외와의 오랜 무역 경험과 역사적인 경험들, 이들의 상업정신이 오늘날의 광동상인들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개혁과 개방에서 무역을 통해 가장 먼저 부(富)를 축적한 상인집단이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의 정책이 무역에서 내수로 변화되면서 오히려 절강(折江)상인들에게 조금 밀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광동상인이 가지는 강점과 약점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광동상인들은 무역과 상업의 전통을 통해 남다른 사업 안목을 키워왔기 때문에 시장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중국 경제의 변화속에서 남들보다 우선 사업기회를 포착하고 새로운 사업과 상업의 영역에서 선진기술을 응용하는데 있어서 탁월하다. 그래서 중국의 많은 새로운 제품과 물론 짝퉁도 포함해서 광동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성과 포용력이 굉장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기업이나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건의나 비판에 대해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데, 주강(珠江)삼각주 지역의 농민출신들이 자신들은 비록 문화와 교육적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대형도매시장이나 고급호텔들과 식당 등을 잘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의 말을 잘 경청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들은 굉장히 현실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사업을 할 때 한발 한발씩 키워나가며 절대로 허황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광동상인들의 현실주의적인 모습은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손안에 들어와야 자신의 돈(賺得手裏的才是錢)”이라던지, “친구는 친구고 사업은 사업이다(朋友是朋友, 生意歸生意)”라는 말처럼 아주 철저하다.
넷째로 대부분의 광동상인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아서 아주 작은 장사에서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종업원이 쉬면 자신이 대신 일을 하고, 큰 상점에서도 사장이 직접 유리를 닦거나 하는 일이 허다하다. 또한 이들은 베이징 사람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광동상인들은 사업에 있어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다른 지역의 상인들에 비해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성격은 사업에서의 보수성으로 나타나 유명한 브랜드나 대기업으로는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또한 사업의 규모도 개인이나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규모 투자나 국제적인 협력 등에서 진취적이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광동상인들의 현실주의적 상업 마인드는 눈앞의 이익에 우선하게 하고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투자를 약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보이지 않는 장기적인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들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광동상인들과의 거래에 있어서 반드시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고 거래를 해야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1: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6) : 복건성(福建省: 푸젠)과 복건인


복건성은 중국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과 인접해있고, 서쪽으로는 강서성(江西省)과, 서남쪽으로는 광동성(廣東省)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는 대만해협을 중심으로 맞은 편에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타이완(臺灣)과 마주보고 있다.
타이완은 원래 복건성에 속한 섬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의 모택동과 국민당의 장개석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에서 패배한 장개석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넘어가 중화민국이라는 정부를 세웠다.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우리와 같이 중국대륙과 타이완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중국과 타이완 간에는 서로 방문하고 경제적인 교류가 허용됨으로서 상호간의 교류가 빈번한 상태이다.
복건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원래 살고 있던 민(閩)이라는 원주민과 춘추전국시대에 월(越)나라 사람들이 합쳐져서 오늘날의 복건사람들이 되었다. 복건성은 유난히 산악지역이 많아서 약 80%에 달한다. 그리고 10%가 물이고 10%가 밭으로 구성되어 있어 농경이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그래서 복건성을 산과 바다의 성(省)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특히 우이산(武夷山)이 유명하다. 우이산은 세계자연경관지로도 유명하며 최근에는 중국에서 가장 환영받는 차(茶)인 대홍포(大紅袍)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이 차의 나무 수령은 1000년이 된다고 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하고 또한 대표적인 홍차로 알려져 있다.
실제 중국 사람들의 차문화(茶文化)는 수천년을 내려오고 있으며, 영국사람들이 중국의 차를 수입해서 발전시킨 후 지금은 전세계로 퍼져있다. 복건성의 안계현(安溪縣)은 옛날부터 차(茶)의 생산지로 유명했다. 지금도 우리가 자주 마시는 중국차인 철관음(鐵觀音)과 우롱차(烏龍茶)등이 생산되고 있다.
중국의 차는 크게 생차(生茶), 반발효차(半醱酵茶), 발효차(醱酵茶)로 구분된다. 생차(生 茶)는 항주(杭州) 서호(西湖)를 중심으로 재배되는 용정차(龍井茶)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항주 여행을 하면 가이드를 따라서 꼭 들리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둘째로 반발효차는 생차와 발효차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복건성이 주산지이다. 그리고 발효차는 운남성의 보이차(普耳茶)가 대표적이며, 이는 홍차와 함께 완전히 숙성시킨 차를 말한다. 복건성의 도시들에 가면 길거리에 직접 차를 포장해서 만드는 가게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어느 집에 가더라도 음료로 차를 대접하고 있다.
복건 사람들은 광동 사람들과 함께 바다를 끼고 있어 해외에 많이 진출했는데 광동성 출신이 약 70%이고 복건성 출신이 약 30%에 달한다. 복건성은 지역에 따라 크게 북부, 서부, 동부, 남부 지역으로 구분하며 이를 민베이(閩北), 민시(閩西), 민동(閩東), 민난(閩南)으로 부르며 지역의 특징에 따라 이들도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민베이와 민동 사람들은 보다 보수적이고 자신들의 생활이 어려워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즐겼다. 반면 민시사람들은 객가(客家)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종족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 내부적인 응집력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복건상인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바로 민난 사람들이다. 바닷가에 접한 이들은 진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해외에 나가 있는 복건성 출신의 화교들이 대부분 이 지역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성공한 후 고향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2: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7) : 푸젠(福建)상인의 형성

중국에는 “세계의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는 중국인들이 있다. 그리고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푸젠 사람들이 있다.” 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푸젠사람들이 해외에 그만큼 많이 퍼져 있다는 것이고 이들이 해외 무역활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푸젠은 지역적 특성과 인종간의 결합이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어 문화적 다원성(多元性)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징은 상업에 있어서도 가족과 지역 등을 중심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어 각 지역 사람들에 따라서 각기 다른 업종과 조직을 갖추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상업집단(幇)은 민난상방(閩南商幇), 푸조우상방(福州商幇), 싱화상방(興化商幇:흥화)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민난상방을 중심으로 하는 푸젠상방은 주로 가족을 중심으로 해외무역과 국내교역에 종사하였다.
푸젠상인들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고 또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멀리는 당나라 이전에 복건성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이미 상업활동을 시작하였고 당나라 시기에는 해외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나라 시기에는 푸젠에서 지금의 우루무치 지역인 서역까지도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확대하였다. 동시에 바다를 통해서는 동남아 지역에서도 무역을 개시하였다. 당시 이들은 도자기와 철과 동제품들을 중심으로 동남아 지역에 수출하였고 대신 황금을 중국으로 수입하는 무역을 하였다.
송나라 시기에 푸젠상인들은 더욱 발전하여 전국 연해지역에 넓게 퍼져 상업활동에 종사하였고 특히 푸젠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첸조우(泉州:천주)는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 세계 제1의 무역항으로 서양에서는 자이톤(Zaiton)으로 불렸고 아랍지역에서 유럽까지 연결하는 해상 무역로였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권력을 잡은 2012년 이후 ‘중국몽(中國夢)’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방법으로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새롭게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대일로(一帶一路)’라고 하며,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을 첸조우로 잡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시진핑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국회에서 동남아 지역국가들에게 21세기의 ‘해상실크로드’를 함께 건설하자고 연설하면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앞으로 중국이 해상실크로드를 구축하게 될 경우 푸젠성은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며 현대의 푸젠상인들의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다.
몽고족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세운 이후 더 대외무역을 개방하였고, 첸조우항은 지속적으로 번영을 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을 제외하고도 민난과 푸조우(福州)의 해상무역이 빈번하였고 특히 푸조우상인의 해외무역이 눈에 띄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도 연해지역 사람들은 해외로 진출하였고 동시에 푸젠의 산간지역 사람들은 다른 성으로 이전하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에 이 지역에는 “장사를 하면 이익을 만들 수 있지만 농사를 지으면 천천히 죽는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뛰어 들었다. 농민들은 농사를 버리고 전국 각지에 퍼져나가 상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지금 장쑤성(江蘇省)의 쑤조우(蘇州)에는 첸조우, 싱화, 푸조우 등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초기에 다루었던 물건들은 푸젠의 명물인 차(茶), 서적, 종이, 설탕 등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대다수였다.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들 머릿속에 남겨있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3: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8) : 푸젠(福建)상인의 특징

한국과 대만의 기업문화를 비교하는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한국은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반면, 대만은 중소기업과 가족중심의 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이 삼성이나 현대, LG와 같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독특한 재벌(財閥)을 만들어 사회적 부를 대기업에 의존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하였다. 한국의 재벌 문화는 다른 국가에는 없는 우리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반면 대만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이 보편화되어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있다. 즉, 부(富)의 분배가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균형있게 나누어져 있다.
대만의 가족 중심의 기업문화는 바로 푸젠상인으로부터 형성되었다. 대만이 이전에는 푸젠성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이 대만으로 넘어온 이후에도 그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푸젠상인들은 기본적으로 혈연관계를 핵심으로 하고 가족의 응집력을 중심으로 가족경영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가족중심의 상업활동이 관리하기도 용이했고 동시에 사업의 비밀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젠의 가족 중심의 상업문화는 일찍이 당나라 시기부터 그 전통이 만들어졌다. 이들의 지리적 위치가 중앙으로부터 너무 멀어 관직을 통한 성공이 매우 어려웠고 또한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그 만큼 약했기 때문에 상업을 통한 성공이 이들에게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푸젠상인 중에 유명했던 용춘안(永春顔) 일가는 가족의 40%가 상업에 종사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 동남아로 진출하였는데 모두 혈연관계를 기초로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대를 이어서 같은 업종의 사업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한국의 어떤 기업가가 대만에서 가격 흥정을 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방문하였는데 이들은 오로지 A라고 하는 기업에게 가라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이 기업가가 고생한 이유는 바로 푸젠과 대만의 가족과 혈연 중심의 상업문화에 대한 이해가 약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사업성공을 위해서는 기업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또한 각 지역마다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지역의 성격과 문화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가 중국의 상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현대의 중국인이 아닌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이들의 전통에 대한 문화와 뿌리깊은 상술의 DNA를 파악할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푸젠상인들은 오랜 시간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그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들은 성공에 있어서 30%는 하늘이 정하며 나머지 70%는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된다고 생각하고 안으로는 중국 내륙과 밖으로는 동남아와 미주 지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까지도 진출하였다.
푸젠상인들 중에서도 해상실크로드의 시작점인 천주(泉州)상인들은 돈을 벌면 이를 저축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기업을 확장하는데 사용하였다. 반면에 푸조우(福州: 푸젠성의 수도)상인들은 번 돈의 50%는 저축을 하고 나머지 50%를 재투자 하였다. 또한 푸젠의 남쪽 상인들은 예를 들어 10만원을 벌면 다시 10만원을 빌려 20만원을 투자하는 보다 모험적이고 공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곤 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푸젠상인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사업에 대한 두뇌회전이 비상하고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으며 절대 눈앞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과 거래할 때 미래의 비전을 이야기하고 장기적 투자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4: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29) : 세계와 중국의 가교로서의 푸젠(福建)상인

푸젠상인들은 덩샤오핑이 잘사는 중국을 만들기 위해 실시한 개혁개방정책을 가장 잘 받아들였으며, 중국 민간주도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다. 특히 천주(泉州)지역을 중심으로 개혁개방 이후 이 지역의 초기자본은 대부분 해외로부터 유입되었다. 즉 해외로부터의 힘에 의해 이 지역이 강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얻었다는 것이고 그 배경에는 바로 화교의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 해상무역이 가장 번성했던 천주는 미국의 뉴욕만큼 번성했었고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푸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다를 이용하는 상인이었다. 해상무역의 발전과 함께 많은 푸젠 사람들은 해외로 이주하였고 오늘날 해외에서 뛰어난 상인들이 되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해외 500명의 부유한 화교중에서 광동성과 절강성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종사하는 영역은 부동산과 금융산업이 대부분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푸젠상인들은 해양문화를 기초로 모험정신과 상업을 숭상하는 정신을 갖추고 있다. 이들의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모험과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동시에 강한 주인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기업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시장이 가지는 잠재적인 상업적 기회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능력과 용기 그리고 모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경영능력으로 사회적 자원에 대해 동원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푸젠상인들은 이 3가지 중에서 특히 모험에 대한 강한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상인들에 비해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러한 강한 모험심은 때때로 감정적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또 한가지 푸젠상인들이 개혁개방 이후 성공한 모델을 살펴보면, 우선 해외에 진출하여 부를 축적한 다음 다시 자신의 고향이 푸젠에 투자를 한다. 그리고 이 투자를 바탕으로 다른 성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다른 지역이 우선 중국 국내에서 성공한 이후에 세계로 진출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모델이다. 이 과정에서 푸젠상인들은 해외에서 자금을 들여올 때 사회적 책임감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자신의 고향인 푸젠성에 반드시 사회적 공익사업에 투자를 한다. 예를 들어 병원이나 학교 등을 무료로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자리잡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푸젠상인들이 더욱 발전하게 된 배경에는 첫째는 푸젠성과 대만의 경제와 무역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동시에 아세안 자유무역지역과 중국 본토와 홍콩간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가족중심의 푸젠상인들이 현대화된 기업체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기업이 창업에는 유리하지만 기업의 더 큰 발전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현대적 기업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셋째는 브랜드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브랜드는 기업과 제품의 단순한 상징일 뿐만 아니라 다른 제품과 기업과 차이를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푸젠상인들은 이제 브랜드화를 시도하여 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다. 넷째는 푸젠상인들의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상회(商會)’를 통해 자신들간의 네트워크를 재정비하고 또 상호간의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오늘날 푸젠상인들은 세계로 진출한 이후에 다시 고향으로 그리고 중국 전역에 진출하고 있으며 세계와 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5: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0) : 장시성(江西省 강서성)의 유래와 역사

장시성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곳으로 들린다. 그러나 최근 발빠른 여행사들이 장시성에 위치한 삼청산(三靑山) 트래킹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어 조금씩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장시성의 이름은 장강(長江)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당나라 시기에 이미 장시란 이름을 얻고 있었다. 또 장시성에는 깐강(竷江: 감강)이 흐르고 있어 장시상인을 줄여서 ‘깐상’이라고도 한다.
장시성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동쪽으로는 저장성과 푸젠성, 그리고 남쪽으로는 광둥성과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후난성, 북쪽으로는 후베이성과 안후이성에 연결되어 있어 중국의 화동지역(華東地域)에 속하고 있다. 현재 장시성의 수도는 난창(南昌:남창)이며, 전체인구는 한국보다 좀 적은 약 4천5백만명이다.
장시성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중국의 역사에서 일찍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춘추 전국시기에 오(吳)나라와 월(越), 그리고 초(楚)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 지역을 놓고 서로 경쟁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초나라의 항우(項羽)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지금의 난창을 이 지역의 행정수도로 삼고 관리하였다.
장시성을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것중 하나가 도자기이다. 우리가 가끔 고급 중국집이나 혹은 중국 여행이나 출장중에 만나는 하얀 바탕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도자기들은 대부분 징더전(景德鎭)에서 생산되는데 징더전이 장시성에 속해있다. 그래서 중국어를 조금 이해하는 사람들은 베이징의 골동시장인 판쟈웬에 가면 한쪽 마당에 도자기를 가득 쌓아놓고 징더전 도자기라고 써놓은 푯말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와 가까운 칭다오(靑島)의 문화거리에 가면 주말에 징더전의 도자기들이 길거리 곳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은 이미 창장(長江)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쌀농사가 양식작물의 90%를 차지하고 있고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를 가지고 있어 민물생선이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와는 조금 다르지만 중국내에서는 장시성의 흑돼지와 황소도 나름 유명세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인물로는 당송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던 구양수(歐陽修), 우리 역사책에서 보았던 왕안석(王安石), 성리학의 대가인 주희(朱熙)가 이곳 출신으로 비록 중앙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던 곳이다.
공산주의 혁명시기에 마오쩌둥(毛澤東)이 도시에서의 혁명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과 함께 산속에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산이 바로 징강산(井岡山:정강산)이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은 ‘게릴라전술(遊擊戰)’을 완성하였고 이후 그 전술은 베트남의 호치밍(胡志明)과 중남미의 체게바라 등의 혁명가들에게 하나의 학습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이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산속에서 이렇게 혁명을 시작한 이유는 중국이 충분히 공업화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자 혁명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농민을 대상으로 혁명을 하는 것이 중국의 혁명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以農村包圍城市)’라는 전략으로 당시 지주와 농민의 모순이 심했던 장시를 택했던 것이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5차례에 걸친 공격을 감행하였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공산당은 1934년 9월 30일 ‘북상항일(北上抗日)’을 외치면서 2만5천리의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을 떠나게 되는데 그 곳이 바로 장시성의 남산진(南山鎭)이다. 지금도 많은 중국의 여행객들과 청년들이 이곳을 찾아 중국 공산당의 혁명근거지와 대장정을 기념하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6: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1) : 대이주와 장시상인의 형성


일명 ‘깐상’이라고도 불리는 장시상인의 역사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면서 군대를 광둥성(廣東省)까지 보냈는데 그때 사용한 길이 바로 중국 남북의 상업도로와 이주민들이 사용했던 길이었다.
장시지역의 전통적인 경제문화의 발달과 상공업의 번영은 중국 전체의 경제적 중심의 남쪽으로의 이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중국 고대의 정치적 중심이 동쪽으로 이전되고 운하가 개통되면서 이 지역이 운하와 연결되었고 남북의 물자교류에 있어서 주요한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나라에서 수나라와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중심지는 ‘관중(關中)지역’이었으나 중앙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남쪽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야 했다. 이를 위해 수나라의 양제는 동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그 과정에서 운하가 완성되었다. 특히 송나라 시기에 도읍을 카이펑(開封)으로 옮겨왔고 이후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가 베이징(北京)으로 도읍을 정하면서 중국 정치의 중심은 동쪽으로 완전히 옮겨오게 되었다. 비록 장시지역이 중국 중심에서 남쪽에 있지만 대운하가 개통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남북이 완전히 연결되었고 그 가운데 있던 장시지역이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둘째는 장시지역의 지리적 위치가 농업을 하기에 유리했으며 특히 중국의 중원지역의 거듭된 전란(戰亂)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했다. 장시지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중앙에서는 수차례의 큰 전란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북방유목민족이 중원을 침략했던 ‘오호(五胡)의 난’이 있었고 이 전란으로 중국은 북쪽의 이민족과 남쪽의 한족간의 대치가 지속되었다. 또 한번은 우리가 잘아는 당나라 현종시기의 안녹산의 난이다. 이 전란으로 북쪽의 유목민족이 또 중원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끝으로는 송나라 시기의 금(金)나라와의 전쟁과 대치 상황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쫓긴 송나라는 남쪽으로 피난오게 되고 이를 남송(南宋)시기라고 한다.
이 세 번에 걸친 북방 유목민족의 남침으로 중국의 북쪽에 살던 한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많은 잉여노동력이 생겨났다. 동시에 중원의 문화도 함께 가지고 이전하여 장시지역도 완전한 중원문화로 동화되었다.
북송과 남송시기를 지나면서 장시지역은 중국 경제의 선두를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차, 도자기, 종이 등을 생산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은 장시지역내의 상품경제와 상업자본이 외부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장시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노동인구의 과잉이 나타났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인 지주들이 토지를 계속 겸병하여 대지주로 변화되면서 점차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동안 약 2천만명이 고향을 등지고 외지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윈난(雲南), 구이조우(貴州), 쓰촨(四川)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후예들의 수는 나중에는 약 1억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했고 또한 무리를 지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장시상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장시상인들의 형성은 바로 장시 지역의 유민으로부터 생성되었고, 또한 유민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기타 산시의 진상이나 안휘의 휘주 상인과는 그 형성과정이 완전히 달랐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7: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2) : 장시상인의 발전

중국의 많은 상인들의 성공을 이야기 할 때 신용과 근검절약은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작은 성공은 지혜로 하지만 큰 성공은 덕으로 이룬다”라는 말들을 한다. 이러한 공통점을 바탕으로 중국의 여러 지역 상인들의 성공은 다 자신들이 처한 위치나 상황에 따라 다른 발전의 경로를 밟아왔다. 그러므로 어떤 지역의 상인들의 성공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개성과 특징, 그리고 경영 이념, 창조정신과 조직의 형식, 생존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10대 상방(商幇)의 대표적인 산시상인(山西商人:晋商)과 안휘상인(安徽商人:徽商)은 중국 정부와의 거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거대한 상방과 함께 중국각지에서 이름을 떨친 장시상인(江西商人:竷商)의 발전과정을 보면 매우 특이하다. 장시상인들은 상인들의 수가 많고, 상업구역이 매우 넓고 생동감있는 상업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중국 어떤 지역보다 상인들의 수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집을 떠나 전국 각지를 돌면서 일명 ‘행상(行商: 보부상)’을 하였다. 이들은 수가 많았기 때문에 세력도 자연히 커질 수 있었고 명성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장시상인들은 안휘상인들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보호하기 위한 상방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장시상인들의 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던 이유는 명청시대에 토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관료지주나 향신지주, 토호세력들이 토지를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농민들은 땅을 잃고 날로 생활이 어려워진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더 이상 고향에 있을 수 없어 고향을 등지고 행상을 시작했다.
이들이 행상을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장시가 가진 풍부한 경제적 자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지역은 수공업이 발달되어 있어 행상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고, 또한 산이 많은 대신 광산이 발전하여 수공업의 원료가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장시 지역에서는 도자기, 차, 종이, 설탕, 연초 등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초로 행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최고의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景德鎭)이 있었고 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이를 행상으로 다른 지역에다 가져다 팔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장시상인들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후난(湖南)지역과 후베이(湖北)지역이었다. 당시 이들의 활동을 빗대어 “장시사람이 없으면 시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無江西人不成市場)”라는 말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이들의 활동 무대는 윈난(雲南), 구이조우(貴州), 쓰촨(四川), 광시(廣西)등이 있었고 중국의 차생산지로 유명한 푸젠(福建)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이차(武夷茶)의 가공과 경영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장시상인들의 세력이 확장되자 현지 사람들은 상권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쫓아 달라고 상소를 올리는 일까지 생겼다. 명나라 시기에 많은 지역의 상인들이 베이징에 와서 자신들의 상인회관을 만들었는데 41개의 회관중에서 14개가 장시상인들이 건립할 정도로 세력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는 비록 세력은 산시상인들보다 약했지만 전체 387개의 회관중에서 장시출신의 회관이 51개로 산시상인들의 45개보다 더 많았던 적도 있었다.
장시상인들은 대부분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행상을 이루어 다른 지역에 비해 개별적 세력은 미약했으나 이들이 모여서 집단적 행상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고 발전시킨 아주 독특한 상인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8: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3) : 장시상인의 몰락

중국의 정치와 경제가 동쪽으로 이전되고 대운하가 개통되어, 운하를 통한 노선이 광둥성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 주요한 길목에는 베이징(北京),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광둥(廣東)이 있었고 그중 1/3이 장시성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 수로는 전쟁물자, 세금, 경제의 핵심이 되었고 심지어는 인구이동의 주요한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수로를 통한 경제적 번영은 상업의 발전을 재촉하게 되었고, 장시상인들에게도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산시상인과 안휘상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청시기의 수백년에 걸쳐 발전하였다. 특히, 장시상인들은 후남(湖南), 후베이(湖北), 푸젠(福建)과 윈난(雲南), 꾸이조우(貴州), 쓰촨(四川), 광시(廣西) 등의 지역에 집중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산시상인이나 안후이 상인들과 같이 중국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함께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이유는 아편전쟁과 중국 국내의 태평천국의 난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의 북방 유목민족들인 몽고족과 만주족의 중국 침입은 오히려 이들에게 더 많은 노동력과 기회를 제공하였으나 19세기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1850년에 2450만명의 인구가 백년의 시간이 흐른 1950년에는 1670만명으로 약 800만의 인구가 감소하였다. 전란의 와중에 자신들의 주요 제품이었던 차, 종이, 목재등이 산림의 훼손으로 생산이 어려웠고, 징더전(景德鎭)의 도자기 생산도 중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더 이상 팔 수 있는 제품들이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태평천국을 진압하던 증국번(曾國藩)은 이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세금을 거둬들여 군비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둘째는 교통노선의 변화가 발생했다. 운하에서 이어지던 중국내의 남북통로가 장시상인들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가 되어왔다. 그러나 청나라 중엽 이후 무분별한 삼림훼손으로 수로가 손상을 당하게 되어 그 기능을 잃기 시작했으며 더하여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로가 이 지역을 지나지 않게 됨으로서 주요한 교통노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었는데, 오히려 이 지역은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연해지역에 비해 점차 낙후될 수 밖에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연해지역과 남북교통의 새로운 중심이 되는 다른 지역에 대한 경쟁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셋째는 중국 경제구조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 이후 광조우, 샤먼(厦門), 푸조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등 지역에는 외국의 자본이 들어왔고, 이 지역들에서는 현대적 기업과 중국의 민족자본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근대화의 물결에 비켜져 있던 장시상인들은 점차 이들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기 시작했다. 비록 이들은 도자기 등의 제품과 수공업제품 등의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양에서 수입된 제품이나 연해지역의 제품등과 비교할 수 없어 점차 경쟁에서 도태되기 시작했다.
넷째는 장시상인 자체의 약점이 있었다. 장시상인들은 비록 장사와 행상을 해서 돈을 벌었으나 이들은 자손들을 관직에 내보내고 싶어하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자손이 관리가 되도록 아낌없이 사용했기 때문에 더 큰 자본을 축적할 수 없었다.
노자(老子)의 유명한 말인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처럼, 우주만물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항상 변화한다는 철학과 같이 장시상인도 흥망성쇠를 겪었다. 장시상인들의 눈물어린 봇짐 행상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식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아낌없이 썼고,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이겨내지 못한 이들의 피눈물이 지금도 장시지역에 가면 자꾸 떠오르게 된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79: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4) : 장쑤성(江蘇省)과 쑤저우(蘇州)상인

장쑤성은 중국의 동부 연해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화동(華東)지역’에 속하며 북쪽으로는 산둥성(山東省)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안후이성, 동남쪽으로는 저쟝성과 상해와 맞닿아있다. 장쑤의 이름은 현재 수도인 난징(南京: 옛이름이 장닝)과 쑤저우의 앞 글자를 따와서 장쑤성이 되었다.
장쑤성은 수도인 난징과 비단으로 유명한 쑤저우, 그리고 대운하가 활발하던 시절 중간기착지로 유명했던 양저우(揚州), 중국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시작점인 렌윈강(연운항: 連運港), 한국의 기아 자동차 공장이 있는 옌청(鹽城) 등 많은 도시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춘추시대에 오(吳)나라가 있었고 이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세웠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가 수도로 삼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난경대학살(南京大虐殺)’을 한 이유가 바로 국민당의 수도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난징에 가면 ‘난경대학살 기념관’이 있고, 현재도 중국이 일본을 향해 이 학살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난징에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특히 이 지역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지 않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택시를 타면 대부분의 기사들이 한국과 중국이 모두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본의 잔악했던 행위를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 중국에서 경제가 발전한 상하이(上海)가 사실은 장쑤성에 속했던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1927년에 국민당이 난징을 수도로 하면서 상하이를 특별시로 삼아 분리했다. 이후 상하이는 세계 각국이 상하이를 분리하여 점령하였으며 지금도 난징루(南京路)에는 각기 다른 유럽식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장쑤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도시가 바로 쑤저우(蘇州)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여행하는 중국의 여행코스 중의 하나로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코스가 있다. 중국의 속담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이 있다는 말처럼 그만큼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쑤저우는 “고기와 쌀의 도시(魚米之鄕)”로 불리울 만큼 물산이 풍부했다. 쑤저우 바로 옆에는 중국에서 유명한 ‘타이후(太湖)’가 있고, ‘물의 도시’ 혹은 ‘중국의 베니스’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또 하나 쑤저우에서 유명한 것은 바로 정원(庭園)이다. 관광객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코스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졸정원(拙政園)이다. 졸정원은 중국 4대 정원의 하나이고 세계문화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졸정원의 이름이 매우 재미있는데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고 당시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쑤저우의 특산품이 바로 '비단(silk)'이다. 이 도시는 물이 많은 도시라서 습하고 무더워 뽕나무가 잘자라 비단산업이 발달하였다. 중국을 비단의 나라로 만들고 실크로드가 시작된 배경이 된 도시이기도 하다. 이전의 마르코폴로가 쑤저우를 방문하고는 자신의 동방견문록에 “이곳 사람들은 모두 비단옷을 입는다”라고 과장하기도 하였다.
이 쑤저우에서 약 40킬로를 가면 타이후(太湖)옆에 둥팅산(洞庭山)이라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의 사람들이 훗날 쑤저우와 장쑤성의 대표적인 상인집단으로 발전하여 중국의 10대상인집단(商幇)으로 발전하게 된다. 호수 옆의 가난한 산속의 지역에서 중국 최고의 부자와 상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배경을 하나씩 살펴보려고 한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80: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5) : 장쑤상인(江蘇商人)의 형성

일반적으로 장쑤상인들이라고 하면 ‘동팅상방(洞庭商幇)’을 말한다. 이들은 쑤저우의 동팅의 서쪽 산과 동쪽산에서 형성된 하나의 지역적 특색을 가진 상인집단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이 상방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중국의 10대 상인집단의 하나가 되었고, “하늘을 뚫는 동팅(鉆天洞庭)”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이들 상인집단이 형성된 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지리적 요소를 들 수 있다. 동팅의 동쪽과 서쪽산은 타이후(太湖)안에 있으며 타이후의 72봉우리중 가장 크고 높은 두 개의 호수안의 섬이다. 비록 풍경은 아름답지만 땅이 협소하고 인구가 조밀해서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다. 특히 이 지역은 양식을 심기에 토양이 적합하지 않았고 생산량도 매우 적었기 때문에 항상 식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농사보다는 차나무와 뽕나무 그리고 과실수등을 심을 수 밖에 없었고, 산을 개간하여 계단식 토지를 만들고 여기에 경제작물들을 심어 외지에서 양식을 교환하여 생활하였다.
대신 양잠업(養蠶業)이 발달하였는데 이곳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누에를 키웠고 방직에 능했으며 이는 대대로 이어져 왔다. 점차 발전한 양잠업은 인근 지역에도 공급할 정도로 생산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금도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비뤄춘(碧螺春)’이라는 차가 생산되었고 붉은 귤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품이 되었다.
자신의 지역에서 부족한 식량을 외지에서 생산된 것과 교환하면서 차와 과일, 양잠 등은 점차 상품화된 작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환의 과정이 계속되면서 운반과 판매라는 일종의 무역활동이 형성되었고 규모가 점점 더 커지면서 동팅상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쪽 지역의 상인들은 주로 양식과 포목쪽의 사업을 하게된 것이다.
둘째는 이들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동팅산의 사람들이 호수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를 타고 나왔는데 그래서 모두 물에 익숙했다. 거친 풍랑을 해치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이들은 용감했고 또 모험심도 강하고 단결과 추진력이 강했다. 이러한 성격은 비즈니스 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노력하도록 만들었고 그 강한 성격이 동팅상방을 발전시키는데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셋째는 문화적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 당나라 이후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하는 ‘강남문화’가 빠르게 성장하여 북방을 능가하게 되었다. 특히 쑤저우는 줄곧 강남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였고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문화사업이 번영하였고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동팅 지역도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에 공부하는 사람들과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소수였고, 과거에 실패한 사람들은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팅상인들은 비교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더 많았고, 이들은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 달리 시야가 넓었으며 또한 판단력도 뛰어났다. 동시에 이들은 신용을 굉장히 강조하였고 자신의 지역사람들을 외지에서 만났을 때 서로간에 협력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같은 고향의 사람들이 어려움에 직면하면 반드시 도와주는 것이 자신들의 상례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들이 위치한 쑤저우 지역의 사회적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쑤저우는 이전부터 상업자본이 집중되었던 곳으로 원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상품경제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동팅지역의 사람들이 쑤저우의 발전한 경제를 통해 자신의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土狹民稠:토협민조)” 어려움을 극복하고 중국의 10대 상방의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81: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6) : 장쑤상인(江蘇商人)의 발전

장쑤상인의 대표적인 쑤저우의 동팅(洞庭)상방은 타이후 속에 있던 동산과 서산지역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들의 지역은 호수안에 있어 교통이 단절되어있었다. 그럼에도 강인한 정신으로 상인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명나라의 유명한 문학가였던 펑멍롱(馮夢龍)은 “동쪽산과 서쪽산의 사람들은 장사를 잘하였고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상업활동을 하였다(話說兩山人,善于貨殖,八方四路, 去爲去賈)”라고 이들을 표현했다.
이들이 중국의 십대상인집단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해외무역의 가장 중심이었던 상하이로 진출하여 상하이의 금융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동시에 기타 다른 영역에서도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동팅 사람들이 상하이 지역에 와서 장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 이들은 비단포목장사를 시작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장 핵심 아이템은 포목이었다. 그래서 지금 상하이와 인근 관광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주가각(朱家 角)이 이전에는 전국의 포목상들이 운집하는 중심지였고 여기 곳곳에서 동팅상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 상하이가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동팅상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하이로 진출해 무역과 상업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신들의 특산인 실크를 운반하여 판매하거나 해산물과 담배등을 판매하는 작은 장사로 시작하였으나 이후 점차 실력을 키워갔다. 중국과 해외자본이 상하이로 몰리면서 은행업도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은행업이 생기면서 많은 동팅출신의 사람들이 견습생으로 들어가 은행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상하이 지역의 상권은 광둥(廣東)상인들과 푸젠(福建)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기타 지역 상인들은 그 세력이 미약하였다. 그러나 1853년에 상하이에서 ‘소도회(小刀會)’의 폭동이 발생하였고 주요세력이 광둥과 푸젠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상하이 정부와 사람들의 광둥과 푸젠에 대한 인상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들의 상업활동이 위축되었다.
광둥과 푸젠상인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고 점차 동팅출신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언어와 풍습, 그리고 지리적으로 상하이에 가까웠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감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초기에 은행업에서 견습을 했던 이들은 점차 중국계 은행뿐만 아니라 HSBC, 시티뱅크 등 외국계 은행에서도 점차 고위직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외국계 금융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금융업 이외에도 상하이 지역의 무역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더 다양한 제품이 필요하게 되었다. 동팅상인들은 이 기회도 놓치지 않고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특히 비단제품을 사고 팔면서 해외로도 수출하기 시작하였고 해외 시장에서 환영을 받았다. 동팅상인은 이러한 수출 라인을 만든 이후에 비단 이외에도 차, 가죽, 약재, 잡화 등 중국의 전통적인 제품도 수출하였다.
특히, 상하이 지역은 유럽 열강들이 각자 조계를 차지하여 국내시장과 해외시장이 동시에 전면적으로 개방되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빠르게 성장하였고 동팅상인들의 부도 점차 늘어났다. 이들은 축적된 자본을 가지고 금융업과 부동산 및 광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발전했고 또한 자식들에 대한 교육도 잊지 않고 중요시 하여 자식들을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더 선진화된 지식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그 전통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82: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7) : 역사적 전환기의 장쑤상인(江蘇商人)


수백년을 이어오던 청나라는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재기를 위해 외국의 군사적 기술과 무기를 도입했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제도적 변혁이라는 변법운동(變法運動)등 수차례의 개혁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 충격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911년에 손문(孫文)이 만든 동맹회(同盟會)의 혁명세력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일으키자 드디어 역사적 종지부를 찍게 된다.
급격한 역사적 변화에 중국의 명청시대를 이끌어 오던 수많은 상인집단들이 시대적 변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역사적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변신에 성공한 것이 바로 장쑤상인들이다.
장쑤상인들은 우선 자신들의 회관을 앞세워 새롭게 들어선 정부와 협상을 하기 시작한다. 우선 청나라 정부의 명령을 철회하고 자신들의 회관 이름도 쑤저우상무총회(蘇州常務總會)로 변경하고 새로운 정부의 유관 상업부서의 허가를 주동적으로 획득했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명칭의 변경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이들은 역사적 흐름에 순응하면서 사고와 행동 모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격변기에 자신들이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새로 성립된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정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고, 특히 1919년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자 대중들의 편에서서 애국운동을 전개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상하이를 중심으로 외국의 제품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자신들도 공장과 기업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상품 박람회에 참여하였다. 사회적으로도 공익사업에 앞장서기 시작했고 아편판매 금지 운동과 방역사업, 치안 사업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도 신뢰를 획득하여 역사적 전환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장쑤상인들은 청나라 말기의 실력을 기초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들이 역사적 전환기에 보여준 대응방식은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현대적 사회로의 발전에 있어서 어떻게 생존과 발전이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새로운 정부에 적응하는 한편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지 않는 아래와 위를 동시에 고려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 전환기를 이겨냈던 장쑤상인들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개혁과 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또 한번 자신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장쑤상인들의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혜안과 또 적극성은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상인집단의 대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장쑤상인들은 이제 ‘쑤저우상인’의 이름으로 중국과 세계에 알리고 있으며 심지어 ‘쑤저우모식(蘇州模式)’이 만들어졌는데 중국의 국영이나 국유기업이 아니라 민간이 설립한 기업들중 연속 5년동안 1위를 차지하였다. 이들이 21세기에 기적처럼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장쑤상인의 ‘성실과 신용’을 토대로 그리고 불굴의 정신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의 의류 브랜드인 ‘보스턴(波司登)’의 가오캉 사장은 초기에 자전거에 50킬로의 옷을 싣고 하루에도 수십킬로를 달려 상하이 시장까지 물건을 날랐다. 그 힘든 길을 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차 있었다. ‘부자가 되겠다는 꿈’ 그리고 이를 향한 쉼없는 노력으로 뭉쳐진 것이 바로 어제의 장쑤상인들이며, 오늘의 쑤저우상인들이다.

중국의 빛과 그림자 183 중국 상인
중국 상인들 (38) : 저장성(浙江省)의 역사와 발전

저장성(浙江省:절강성)이라고 하면 금방 귀에 익지 않겠지만 항저우(杭州)는 중국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라서 낯익은 이름이다. 바로 저장성의 수도가 항저우이다. 저장성은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중국의 동해, 그리고 남쪽으로는 푸젠성(福建省)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장시성(江西省)과 안후이성(安徽省)에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상하이와 장쑤성(江蘇省)이 있다.
면적은 중국 전체의 1%에 불과해 중국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지역중에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월(越)나라의 영토였고, 이후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권(孫權)이 통치했던 오(吳)나라가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저장성은 중국 강남문화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고, 또한 ‘비단의 지역(絲綢之府)’ 혹은 ‘물고기와 쌀의 고향(魚米之鄕)’ 으로도 불리운다.
중국의 여러성 중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성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가장 흥성했던 지역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가장 잘사는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경제가 발전하여 독특하고 분명한 ‘저장경제(浙江經濟)’를 가지고 있으며 개혁개방 이후 수십년간 주민소득이 중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저장성에는 몇 개의 유명한 도시가 있는데, 첫째는 항저우이고 둘째는 닝보(寧波), 셋째는 원저우(溫州)라고 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들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최고의 상방들로 유명세를 널리 알리고 있다.
상업의 발전으로 유명한 닝보와 원저우 이전에 우리에게 더욱 익숙한 이름은 아무래도 항저우일 것이다. 항저우는 쑤저우(蘇州:소주)와 함께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을 들을만큼 살기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 고대 물류의 중심이던 ‘경항(京杭)운하’가 바로 베이징과 항저우를 가리킨다. 항저우에서 시작한 물류가 베이징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항저우에 있는 시호(西湖)주변은 용정차(龍井茶)가 생산되어 중국 최고의 녹차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최근까지 항저우를 중심으로 하는 저장성은 중국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이기도 하다. 항저우는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강남 문화의 중심지였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문화가 가장 흥성했던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에, 특히 송나라가 만리장성 너머의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와서 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중심에 항저우가 있었다.
한편, 닝보(寧波)는 양자강 하류에서 발전된 항구도시로 유명한데, 이름이 매우 재미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이 지역에 조류가 밀려올 때는 높이가 3-4미터나 되어 바닷가 근처의 사람들이 파도에 의한 피해가 많았기 때문에 ‘파도가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도시 이름이 닝보가 되었다. 현재는 인구가 약 700만명에 이르는 중형도시이고 양자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닝보는 운하와 바다를 함께 가지고 있는 지역적 특징과 개혁개방 이후 장강삼각주 개발의 중심에 놓여 있어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닝보항구는 세계 항구중에서 6번째로 큰 항구로 발전하였고 화물취급량이 해마다 9.2% 이상 증가하여 중국 해운항만 물류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항구로 거듭나고 있다. 바로 이 닝보가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10대 상방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고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빠른 경제의 전형적인 도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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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인들 (39) : 저장성(浙江省)의 닝보상인(寧波商人)

저장성을 중심으로하는 저장상인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개척정신으로 유명하다. 특히 항저우상인(杭州商人), 닝보상인(寧波商人), 원저우상인(溫州商人)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얼마전 뉴욕의 증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알리바바의 회장 마윈(馬雲)이 저장성 항저우 출신이다. 그는 1988년 항저우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한 이후 영어강사, 관광가이드를 했고 통번역회사도 운영했다. 1995년에 항저우에 ‘차이나페이지닷컴’이란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후 그는 원가를 줄인 기업간 거래 중개라는 간단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바로 이러한 개척정신들이 중국의 저장상인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장상인들이 중국의 10대 상인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던 배경을 살펴보면 첫째, 저장성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물산을 들 수 있다. 저장성은 내륙으로는 운하와 동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있어 물류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이 지역은 비단과 면, 어업과 소금업이 발달되어 있어 다른 지역과 왕성한 상업을 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는 교통인데, 교통은 물류에 있어서의 선결조건이며, 상품의 유통에 있어서 수로와 육로의 연결이 매우 중요하다. 저장성은 동남연해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으로는 운하와 직접 연결되어 조운(漕運)과 상업 교통이 발달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비단등의 판매가 원활했다. 특히 닝보는 해상교통의 요지였고 해상실크로드와 도자기 수출의 중요한 항구였으며 송나라와 원나라를 거치면서 해외무역에 있어서 일본과 한국 및 동남아와 무역을 하였다.
저장상인들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물산, 예를 들어 비단. 쌀, 수산품 등을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상업활동을 하였다. 이를 더욱 왕성하게 해준 것이 바로 교통이었는데 중국 동남지역의 교통의 중심축으로 편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상인들이 닝보와 원저우상인들이다. 우선 닝보 상인들은 이미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부터 해외무역에 종사해왔는데 남쪽으로는 푸젠과 광동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일본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고려가 있어 상선(商船)의 왕래가 빈번했고 물자가 풍부했다. 원나라 시기에는 해상실크로드와 도자기 해외무역의 출발점이 되었고 명나라 시기에는 동남아 국가들과도 무역을 함으로서 이들의 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
또한 청나라 시기에는 외국 무역의 교두보가 되어 영국과 네델란드, 그리고 동남아의 각국의 상단(商團)이 닝보를 무역의 기지로 활용하였다. 닝보상인들은 다른 상인들처럼 전국 각지에 자신들의 회관을 설치하였고 은행업과 약재업, 의류, 수산품 및 해외로부터의 수입품등을 취급하였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몽골에서 남쪽으로는 광동과 광시, 그리고 서쪽으로는 사천까지 전국을 자신들의 상업활동 영역으로 삼았다. 해외로는 일본, 동남아 그리고 유럽과 미국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
닝보상인들은 세계 곳곳까지 영역을 넓혔는데, 특히 아편전쟁 이후에는 저장상인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저장상인들에 대한 평가는 지리적인 장점을 이용하여 해외무역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중에 이들은 개척정신과 용감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일찍부터 “상업을 하지 않으면 부를 이룰 수 없다(以不通商販不甚富)” 는 것을 체득하고 있어 상업을 중시하여 지금까지도 중국 최고의 상인중의 하나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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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인들 (40) : 저장성(浙江省)의 원저우상인(溫州商人)

저장성에 속해있는 원저우의 상인들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특히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원저우 지역은 저장성 가장 남쪽에 있어 푸젠성의 북쪽과 맞닿아 있고 동쪽은 바다이며 육지는 모두 산악지대라고 할 만큼 척박한 땅을 가지고 있다.
인구는 현재 900만이 넘지만 산악지대로 농지가 매우 적어 일인당 농지 면적이 100평 미만으로 척박하며 또한 여름에서 가을까지 중국에 상륙하는 태풍의 절반이상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가니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손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어려운 자연환경은 오히려 이들을 강하게 변모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인구도 많고 농사지을 땅도 없으며 교통도 불편한 지역에 살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의 영민함과 창조적 능력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는 불굴의 정신과 고통과 어려움을 인내하는 정신, 한 가지 방식과 규칙에만 구애받지 않는 독창적인 성격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그 와중에 원저우상인들은 어떤 방식이 상호 이익을 극대화하는가를 고민하고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원저우 상인들은 21세기 지금에 와서도 자신들만의 ‘원저우모델’을 만들었는데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는 다른 아주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행하면서 그 정책에 따라 자신들을 변화시켜왔다. 그리고 경제사회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적응력을 보이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원저우상인들의 대부분은 농민들인데, 농민들은 자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도움없이 순수한 자신들만의 힘으로 부를 이루었다. 이들의 ‘풀뿌리 창업’ 정신은 다른 상인집단에서 따라올 수 없는 정도로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들 상인집단의 또 다른 특징은 이동성이 매우 강했고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유동성을 보여왔는데 세계 각지로 발전하여 자신들의 상인조직을 결성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창업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집단적 창업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미 자신들이 창업에 성공한 모델을 복제하여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여 ‘원저우 모델’을 이식하고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확대하여 세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원저우모델’의 용어는 1986년에 발간된 ‘랴오왕(暸望)’ 이란 잡지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소상품, 대시장’이다. 이 말 뜻은 작은 상품들로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였다는 의미이고 중국에서는 원저우 모델을 “전문시장의 공급자들 및 판매자들, 농촌의 인재들이 가족경영을 기반으로 삼아 가내공업과 연합경영공업을 중견산업으로 발전시키고 이들은 도시 주변에 있는 농촌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 번영시킨 것이다” 라고 평가한다.
원저우상인들과 가난한 사람간의 매우 재미있는 대화가 있다. 가난한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도 해본적이 없는데 만약 내가 하다 실패하면 어쩌지?”라고 하자 원저우상인은 “그게 뭐 겁나는 일인가, 오히려 경쟁자가 없어서 더 좋은 시장이지”, 또 가난한 사람이 말하기를 “장사를 어떻게 해야 돈을 벌지, 일원씩 벌더라도 자신의 이익이 되면 그렇게 해야지”라고 하자 원저우상인은 “장사는 자기만 부자가 될 생각을 하면 안돼, 10원을 버는 장사라면 6원만 벌면 충분하고 나머지 4원은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야해,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어야 해. 이렇게 해야 남도 돈을 벌 때 당신을 생각해주지. 그게 당신이 돈을 더 벌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뜻이야”라고 대답했다. 또 “창업이 너무 힘들어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보다 못해요”라고 하자 “고생하지 않고 어떻게 성공해? 고생에 고생을 겪어야 남들 보다 낫지 낮에는 사장을 하고 밤에는 바닥에서 잠을 잘 자세가 되어야해”라고 충고하는 장면들이 있다. 지금도 중국을 방문해서 원저우 상인들에 대해 물어보면 모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이들의 부(富)에 대한 집착과 성공을 향한 노력들은 중국의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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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인들 (41) : 저장상인(浙江商人)들의 사업원칙

저장상인들은 이전부터 지금까지 중국 경제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어왔고 특히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민간경제부분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저장성 상인들의 사업원칙을 살펴보면 현대 중국상인들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 저장상인들은 항상 정부의 정책에 민감하다. 중국인이 성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세가지 요소들 ‘천(天) 지(地) 인(人)’ 중 정부의 정책을 ‘천시(天時)’에 해당한다고 간주하여 항상 정부의 정책과 방향을 읽고 자신의 발전 전략을 수립한다.
- 사업의 규모에서 절대로 무리하지 않고(不貪大:불탐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상품(小商品)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아무리 작은 돈도 돈이다. 작은 돈을 벌지 못하면 큰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一分錢也是錢, 小錢不賺, 大錢不來)” 라는 말과 같이 저장성의 대부분의 기업은 아주 작은 상품에서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윤이 극히 작은 빨대나 연필 등으로 시작해서 큰 성공을 이룬 것이다.
- 이들은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기본적 철학이다. 비록 낮에는 사장으로 일하지만 저녁때는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기회가 있으면 기회를 잡고 기회가 없으면 기회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 사업에서의 기회는 매우 중요하다. 저장상인들은 기회가 없는 곳은 없으며 시장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고 이야기 한다. 이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오히려 그 어려움 속에서의 사업의 기회를 찾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 저장상인들은 자신들에게 사업의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중국 최대의 음료수 그룹인 “WAHAHA”의 회장인 총칭호는 만약 내게 기회가 온다면 나는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며 앞으로 전진하여 나의 목표를 반드시 도달한다. 이러한 정신이 저장상인들의 사업정신이다.
- “비즈니스의 전쟁터에서 상대는 있어도 적은 없다(生意場上有對手, 但沒有敵人)” 라는 말처럼 저장상인들은 절대로 사업에 있어서 적을 만들지 않는다.
- “꽌시가 돈이다 이를 통해 천하를 얻는다” 라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가 저장상인들이 성공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이다. 대부분의 저장상인들은 친구가 많으면 기회 역시 많아진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 협력파트너가 매우 중요하며,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유명한 원저우 상인은 “사업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쉽게 믿어서는 안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상업의 비밀은 절대 노출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당신의 기업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 “신용이 중요하며 다리를 건너고 다리를 끊어서는 안된다(重信義, 不要過河拆橋)”라는 말의 내용은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신용이 중요하며, 사업에서 필요할 경우 이용하고 그리고 나서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 다리가 자신이 다시 건너가야 할 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장상인들은 다른 성공한 상인들과 같이 신용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이 사업 성공의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발전한 저장상인들의 사업원칙은 단순히 한국에서의 사업뿐만 아니라 중국인과의 사업에서도 한번쯤은 고려해보고 살펴봐야할 대목이다. 중국인과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보다 큰 사업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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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인들 (42) : 중국에서 사업하기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과 시장의 확대는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시장의 유혹이다. 중국 시장 전체로 볼 경우 현재 중산층이 약 5억명에 달하고 있어 한국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중국에 진출한 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통해 성공을 하기도 하고 또 비즈니스의 무덤이 되기도 하고 있다.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중국에 진출하고 또 중국 진출 이후에 어떻게 비즈니스를 관리할 것인가가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는 어떻게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성공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우선 대리권에 관련된 부분이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이해도 부족과 자금 부족을 이유로 중국의 기업에게 중국 전역의 총 대리권을 넘겨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중국의 34개성(23개의 성과 4개의 직할시, 5개의 자치구)의 광대한 영토는 각기 다른 시장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을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34개의 국가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절대 중국 전역의 대리권을 넘겨주어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지역의 대리권을 주고 그리고 실적에 따라 권역을 확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거래하다 보면 꽌시를 강조하면서 물건 대금을 외상으로 하자고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부동산을 담보로 하겠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은 토지 자체가 국가의 소유이므로 부동산 담보의 개념이 우리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매출확대에 연연해 외상으로 할 경우 중국 투자의 실패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으므로 외상은 금물이다.
자금이 있다고 해서 중국을 쉽게 생각하고 진출했다가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많이 있다. 우선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시장조사와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먼저 중국의 포털사이트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충분히 자료수집과 시장조사를 하여야 하고, 중국 현지에서도 직접 방문해서 조사를 마쳐야 한다. 단지 통역이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도 자신이 져야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중국의 협력 기업과 회식이나 상담할 때에 우리 기업가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실력을 보이고 싶어서 회사의 기술이나 노하우 등을 자랑하면서 기업기밀이 새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중국과의 협력관계에서는 절대로 말이 앞서서는 안된다.
중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이 우선시 해야할 것은 중국에서의 상표등록이다. 상표등록의 비용이 그다지 비싸지 않고 한번 받아두면 20년간 유효기간이 지속되므로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많은 기업들이 상표등록 없이 진출했다가 이미 중국 파트너 기업이 먼저 등록해서 중국 진출에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상표 등록시 영어, 한국어, 중국어, 그리고 회사의 로고를 함께 등록하는 것이 좋다.
투자비용과 관련하여 지금은 많이 사례가 줄었지만 이전에는 한번에 올인(all in)해서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서의 사업은 분산투자와 단계적 투자가 필요하다. 사업의 발전정도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한족이나 동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신의 중국어가 그만큼 되지 않기 때문인데 대신 중국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인들은 강한 민족적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하다. 반말을 하거나 비인격적인 대우를 할 경우 반드시 반대급부가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사업성공의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