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87 - 중국 인물열전 (28) 이대교(李大釗)와 중국 혁명

Author
ient
Date
2018-01-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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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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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28) 이대교(李大釗)와 중국 혁명

진시황 이후 수천년간 황제체제에 익숙해있던 중국이 어떻게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까?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지금까지 중국을 대표하고 세계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가 되었을까?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서양열강의 침입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어주고 세계 강대국의 먹이가 되어 누구나 원하면 빼앗을 수 있는 허약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한 고통은 1842년의 남경조약 이후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

당시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과 선각자들은 중국을 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상을 받아들여 서양의 계몽주의, 공리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 격동의 시기에 한 인물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이대교이다. 한국에서 이대교로 불리지만 한자음은 ‘교’가 아니라 ‘쇠(釗)’이다. 그는 중국에 대한 열강의 침입이 한창일 때인 1889년에 하북성에서 태어났다. 천진(天津)에서 전문학교를 마친 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유학 도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했고, 일본의 중국에 대한 야욕에 대해 유학생으로 일본에 투쟁했다.

이후 1916년에 귀국한 후 북경대학의 도서관 관장과 경제학 교수를 맡으면서 중국을 구하기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중국이 과거의 구습을 버리고 새로운 중국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장한 신문화 운동은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따르게 하였다.

이때 유럽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바로 러시아 제국이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무너지고 공산주의 정권이 러시아에서 수립되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무장한 레닌은 1917년 10월에 볼쉐비키 혁명, 즉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소련이라고 국호를 정했다.

지금부터 100년전의 일이다. 비록 지금은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한 철학자, 즉 마르크스의 이론에 기대어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가 등장하였다.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혁명가들이 만들어 낸 ‘무산계급’이란 단어는 서양의 침략에 분개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하던 젊은 지식인에게 한줄기 희망처럼 다가왔다.

이대교는 소련의 공산주의에서 중국의 미래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서민의 승리’, ‘볼쉐비키주의의 승리’, ‘나의 마르크스관’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했다. 당시 최고의 지성인으로 손꼽히던 이대교의 글들은 많은 파장을 초래했다.

북경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이대교가 그리고 남쪽에서는 진독수(陳獨秀)가 공산주의를 소개했고 1920년에는 공산주의 연구회, 그리고 이어서 1921년에는 ‘제1차 공산당 대회’를 개최하였다. 바로 중국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국가주석이 된 모택동이 당시 이대교 밑에서 사서로 있었고 공산당 대회에 호남성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이후 그는 손문과 협력하여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성공시키고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열강과 군벌들에게 대항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당시 만주의 군벌이던 장작림(張作霖)에게 체포되었다. 1927년 이대교는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1927년에 교수형을 당해 중국 혁명의 성공을 보지 못했다.

만약 이대교가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하고 공산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리고 모택동이 이대교 밑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중국과 중국 공산당이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