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88 - 중국 인물열전 (29) 정화(鄭和): 세계 바닷길을 열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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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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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신문

(29) 정화(鄭和): 세계 바닷길을 열다

세계적인 대항해가를 찾으라면 우리는 금방 이태리의 항해가였던 ‘콜롬버스’를 떠올린다. 그가 1492년에 신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역사책에서 배웠고 또 ‘콜롬버스 달걀세우기’의 이야기로 도전 정신을 배워왔다. 그 이유는 근대 이후 서양이 세계를 지배해왔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받아들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장보고(張保皐)는 콜롬버스보다 500년전인 9세기에 동아시아를 누비면서 동아시아의 해상왕으로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그래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산동성의 위해에 가면 그가 세우고 활동하던 법화원을 볼 수 있다.

이후 중국에도 콜롬버스보다 거의 100년이나 앞선 시기에 유명한 항해가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정화(鄭和)이다. 최근 중국 정부가 육상실크로드와 해상실크로드를 강조하면서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고 있다.

정화는 고향이 운남성이었는데 명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일찍이 환관(宦官)이 되어 궁에서 생활했다. 그의 원래 성은 마(馬)씨였고 아랍계통의 회족(回族)이었다. 이후 명나라 황제를 크게 도운 일이 있어 황제가 그에게 ‘정(鄭)씨’성을 하사하여 정화로 불리게 되었고 환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명나라의 성조가 황제가 된 후 동남아 지역의 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마침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아랍 사람으로 해상에 익숙했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정화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정화는 1405년에 군인과 의사, 상인 등 모두 2700명을 거느리고 실크, 도자기, 식량 등의 물자를 큰 배 62척과 작은 배 200여척으로 된 선단을 이끌고 1차 항해를 시작했다. 남경쪽의 유가항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남쪽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지나면서 동남아의 각국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후 1409년까지 명나라 황제는 3차례에 걸쳐 정화를 파견하여 무역로를 개통하고 바닷길을 열었다.

1412년에 4번째 항해는 보다 멀리 나가게 되었다. 인도양을 지나 해상실크로드의 중계항인 페르시아만까지 진출하였다. 이후 아프리카 연안까지 도달하여 중국, 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아프리카까지 해상실크로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새로운 황제와 관료들은 낭비라고 생각하여 잠깐 동안 그 항해가 중단되었다. 황제가 바뀐 후 정화는 황제에게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1431년 7번째의 대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7번째 항해중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는 7번의 항해를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모두 30여개의 국가와 지역을 항해했고, 그의 어렸을때의 이름인 삼보(三寶)를 딴 사원들이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에 지금도 남아있다.

중국은 정화 이후 더 이상의 항해를 하지 않았고,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금해령(禁海令)’을 내렸다. 금해령은 중국인이 바다로 나가거나 무역을 할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금해령으로 국민들을 안으로 가두고 있는 동안 유럽은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해양을 누비면서 국력을 키워갔다. 특히 섬나라인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과 바다를 제패하는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여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ica)’, ‘해가지지 않는 나라’를 이루었다.

바다를 소중히 하지 않았고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중국은 다시는 정화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고 근대에 들어와 열강들의 침략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계의 중심은 중국에서 서양으로 옮겨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