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21세기 중국의 빛과 그림자 64 중국의 빛과 그림자 64: 중국 ‘이화원(Summer Palace)’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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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nt
Date
2018-01-0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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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email protected]
출처: 평안신문, 승인 2012.07.25 16:09:57

중국의 베이징에 가면 만리장성과 함께 꼭 들리는 관광지가 하나 있다. 바로 청나라 말기에 세워진 황실의 정원인 이화원이다. 베이징 대학과 칭화대학등 중국의 유명한 대학들이 위치하고 있는 베이징 서북쪽의 ‘하이디엔취(海淀區)에 위치하고 있다.

이화원은 청더(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庄)과 쑤조우(소주: 蘇州)의 졸정원(拙政園), 유원(留園)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의 하나이다. 황실의 정원인 이화원은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西太后)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청나라의 유명한 건륭(乾隆)황제 시기(1750년)에 시작하여 약 15년간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중국은 외국 열강의 침입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제 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이 정원을 습격하여 내부의 보물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거의 폐허가 되었다.

이후 광서(光緖)황제 시기(1886년)에 이를 다시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정권의 실력자이던 서태후는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 준비된 자금을 이용하여 건축비로 충당하였고 1895년에 공사를 완공하고 이름을 이화원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화원을 둘러본 사람들은 모두 그 규모에 놀라게 되는데 전체 면적이 약 3평방킬로미터에 달하고 그중 인공호수의 면적이 4분의 3을 차지한다. 내부에는 100개 이상의 건축물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정자와 인공구조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이화원의 역할은 여름철에 황제와 서태후가 자금성을 벗어나 내정과 외교등을 펼치는 무대로 사용되었으며, 황제와 서태후가 여기서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영어 이름은 ‘여름궁전(Summer Palace)’으로 불린다.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축할 당시의 중국의 재정상황은 극도로 궁핍했다. 수차례의 유럽 열강들과의 전쟁으로 국고는 바닥나고 서민은 도탄에 빠져 있었으며 언제 민중의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화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경비가 부족하자 당시 해군을 건설하던 비용을 사용하였다.

이때 사용한 해군의 경비는 바로 우리와 가장 인접한 산동성의 웨이하이(威海)의 북양해군의 건설자금이었다. 북양해군은 청나라 말기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근대화된 해군이었고, 바로 웨이하이의 ‘류공다오(劉公島)’에 건설되었다. 이 섬은 웨이하이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외국의 침입에 대한 자신의 반성과 자구책으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하게 된다. 양무운동이란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외국의 세력을 막아내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군사력의 증강이었고, 특히 해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북양함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1888년에 완성된 이 함대는 아시아 최고의 해군 함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그 해부터 이화원 건설에 부족한 자금을 메우기 위해 해마다 예산이 축소되어 낙후된 장비나 대포 등을 수리하거나 새로이 구입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포탄조차도 구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1894년 청일 전쟁을 시작했다. 이미 무용지물이 된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에게 전멸당했으며, 청나라는 일본과 ‘시모노세키(馬關)조약’을 체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우리가 베이징 여행지로 손꼽는 이화원이 바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망하게 된 비밀을 간직하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