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21세기 중국의 빛과 그림자 61 중국인민군, 압록강을 넘다

Author
ient
Date
2018-01-09 10:17
Views
217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email protected]
출처: 평안신문, 승인 2012.07.05 09:55:45

단동(丹東)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이다. 이곳에 가면 북한의 조잡한 공예품들과 기념품들을 곳곳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건너편의 신의주를 바라보고 또 모터보트를 타고 압록강을 돌아보기도 한다.

일반적인 여행코스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단동의 진장따제(錦江大街) 68호에 가면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紀念館)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중국이 자신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여 건축한 곳으로 원래 1958년에 지었다가 나중에 증축하였다. 새로 건축된 이 기념관은 한국전쟁 정전 40주년인 1993년 7월 27일에 개관하였다. 이 건축물의 중앙에는 덩샤오핑의 글씨로 씌어진 ‘항미원조기념탑’이라는 53미터의 탑이 버티고 서있다.

우리의 가슴속에 별로 유쾌하지 않은 곳이라서 망설여졌지만, 도대체 중국인들의 머릿속에는 한국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을까하여 방문한 적이 있다. 약 18만평방미터의 넓은 부지에 계단을 올라가면 기념탑과 몇 개의 기념관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마오쩌둥과 당시 총사령관을 담당했던 펑더화이(彭德懷)의 조각상이 놓여있고 자신들의 전쟁승리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수립하기 이전의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태도와 입장은 한마디로 한국과 미국의 연합군이 38도선을 넘어 공격하자 북한과 중국이 이를 격퇴했다라는 주장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한중수교 이후에는 그 주장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였고, 미국과 대만이 중국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참전했다라고 그 주장이 바뀌었다.

한중수교 20주년을 앞둔 최근에는 또다시 중국의 한국전쟁의 참전에 대해 태도가 변화되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1950년 1월에 김일성이 소련과 남침을 구상하였고, 5월 중순에 김일성이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하여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한국전쟁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아직 전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반대하였다. 스탈린은 이후 마오쩌둥에게 단동과 심양에 몇 개 사단의 병력 배치를 요구하였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한 장비와 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고 스탈린은 이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후 한달도 안되어 김일성은 6월 25일에 남침을 시작하였고 그 날짜를 중국에게 통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6월 28일에 마오쩌둥은 발표를 통해 전쟁 준비를 지시하였고, 7월 13일에는 13병단과 기타 부대 25만명을 동원하여 동북변경군을 조직하고 이어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10월 19일 평양을 점령당하자 대기하고 있던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우리가 단동에서 바라보는 압록강이 바로 중국의 인민지원군이 물밀듯이 한반도로 밀려들어간 곳이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첫째는 만약 김일성이 패퇴하여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울 경우 전선이 중국 영내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과 이 경우 타이완의 국민당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둘째로는 한국전쟁과 동시에 미 7함대가 대만해협에 급파됨으로서 언제든지 본토를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은 이 전쟁을 통해 혈맹의 관계가 되었고 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금도 압록강 대교 위에서 내려다보면 중국의 많은 물자들이 북한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북한의 가장 큰 후원국이 되었고 지금도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고 있다.

해질 무렵 단동과 신의주를 잇고 있는 압록강 대교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분단을 고착시킨 중국군대의 그림자가 지금도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