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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국제교육통상연구소</title>
		<link>https://ient.or.kr</link>
		<description>International Edu-Trade Institute</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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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34) - 개혁개방 40주년]]></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6]]></link>
			<description><![CDATA[작은 거인으로 불리던 등소평이 11기 3중전회에서 카리스카 넘치는 모습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외친지 40년이 지났다.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중국의 문호개방은 중국 인민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등소평의 염원을 담아 이루어졌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실제로 아편전쟁 이후 진정으로 중국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등소평에서 시작된 개혁개방은 40년을 지나면서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만들어냈다. 길거리의 인민복은 사라지고 또 자전거 대신 자가용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사람들의 주머니에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 얼마전 중국의 국경절에는 약 5억 명이 관광지를 찾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러한 개혁개방의 빛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씩 깃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슈는 미국과의 무역전쟁이 될 것이다. 트럼프의 강력한 대중국 무역제재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화폐인 인민폐는 평가절하가 되었고 외국 자본들이 중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히 무역 의존도가 높은 광동성과 복건성 등 동남 연해지역의 기업들은 도산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무역전쟁이 40주년의 개혁개방을 무너뜨릴 만큼 그렇게 거센 것일까? 좀 더 중국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해놓았다. 첫 번째는 ‘도광양회’원칙이었다. 즉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조용히 실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永不稱覇)’였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개혁개방 40년이 되면서 현재의 지도자인 시진핑은 자신감에 넘쳐 등소평의 유언과 원칙을 잊고 있었다. 시진핑은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의 꿈’을 강조하고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고 강조했다. 시진핑은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역대 지도자들이 정상적인 권력 승계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격대지정’을 깨뜨렸다. 격대지정이란 2021년이 되면 시진핑의 권력 10년째가 되며 그 다음 지도자를 시진핑의 제2기가 시작되면서 정해놓아야 하는 원칙이다.
시진핑 자신의 권력 승계의 불안정성과 동시에 강한 리더십과 공산당에 대한 권력 집중을 위해 민간 기업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의 80%이상을 지지하는 민간 기업들에 대한 정부 간섭의 강화는 알리바바의 마윈이 은퇴를 고민하도록 하였고 창의력을 바탕으로 하는 민간기업의 발전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무역전쟁으로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가 강화되면서 또 다른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다. 전체적인 상황을 종합해보면 미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전쟁이 비록 경제적 영향을 줄수는 있지만 중국을 붕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중국 내부의 정치적 권력구조가 가지는 한계성이 경제에 악영향을 주면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격동기를 지나왔던 작은 키의 등소평이 만들고 설계해놓았던 개혁과 개방 정책은 4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가난과 고통의 중국인들에게 희망과 잘 살 수 있다는 자존감을 선물해주었다. 그러나 공산당 1당체제가 가지는 구조적인 문제, 즉 개인에 대한 권력 집중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했고 현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데 문제를 야기했다.
개혁개방 40주년의 중국의 오늘은 중국인들에게 기쁨과 자신감을 주었으나 미래의 중국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은 주지 못하고 있다. 경제의 발전과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발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발전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Mon, 22 Oct 2018 22:12: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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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33) - 미중 갈등속의 한국]]></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5]]></link>
			<description><![CDATA[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시진핑 시기에 구체화되고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그 범위는 유라시아 대륙과 그 연선에 있는 국가를 포함하고 있으며, 일대일로 정책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이후에는 국제질서에 커다란 변화가 초래될 것으로 보인다.
일대일로 정책은 중국 스스로를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플랫폼의 중심으로 설정하여 중국의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정책의 추진 배경은 국내외적으로 복합적인 요인들이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분석할 수 있다. 중국 국내적으로 ‘중국의 꿈’과 ‘두개의 100년’이라는 중국의 국가전략으로 설정하여 시진핑의 지도체제와 중국 공산당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현재 글로벌 경제의 둔화와 중국 자체의 경제발전에서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는 전략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나타난 문제들, 경제성장 속도의 둔화, 지역간 격차, 과잉투자 및 과잉생산 등의 문제를 일대일로 정책을 통해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미국의 강력한 제재와 반발에 직면하여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회귀 전략’에서 시작된 중국에 대한 봉쇄전략(containment strategy)은 미중간 무역전쟁으로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는 이번 기회에 중국의 도전을 완전히 봉쇄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전략이 맞아떨어지고 있다. 현재 중국의 많은 기업들이 도산 위기에 처해있고 금융의 펀더멘탈이 약화되면서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이제 중국의 외교부장이 전면에 나서서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으며 미국을 대신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뱉어낼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다. 인도와의 연결을 통해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진주 목걸이’ 전략의 가운데를 끊으려고 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제통합체를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일대일로 노선상에 있는 많은 국가들이 중국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고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사업을 취소하는 등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미국과 중국은 가장 중요한 파트너들이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이다. 동시에 중국 역시 한국의 무역에서 가장 큰 파트너이고 대외무역의 25%가 중국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두 나라의 갈등이 심화될수록 한국에게는 불리한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
한국이 이러한 갈등과 난제들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먼저, 한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대일로 정책의 추진에 포함된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뿐만 아니라 서해를 중심으로 500km이내의 거리를 마주보고 있는 한국은 일대일로 정책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5년 한중 양국간에 발효된 ‘한중FTA’와 더불어 한국의 역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 진출 전략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나 신남북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일대일로정책과의 연계가 필요하다.
둘째 한국이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서서 일대일로 정책과 연계하여 중국의 서부지역 및 유라시아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 중 한 가지가 남북한 간의 철도를 연결하는 것이다.
남북한간의 철도 연결은 경제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한국이 고립된 섬이라는 현상태를 타파하는 중요한 기제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시작된 철도는 중국과 러시아를 지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중앙아시아와 유럽까지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철도와 연결될 경우 남쪽으로는 동남아와 인도까지도 연결 될 수 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미중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속에서도 한국은 우리의 길을 찾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Mon, 22 Oct 2018 22:09: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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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32) - 인도네시아 - 섬의 천국]]></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4]]></link>
			<description><![CDATA[인도네시아 역시 해상 실크로드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고 그 아래로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있고 서쪽으로 진출하면 인도양을 만나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수도는 자카르타이고 인구는 중국, 인도, 미국 다음으로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가장 큰 경제적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항공기술이 뛰어나고 석유가 생산되어 OPEC 회원국에 가입한 적도 있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17508개라는 엄청난 수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섬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말라카 왕국과 함께 중국의 당나라시기에 중계무역으로 번창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원나라도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한 적이 있었고 이 때 원나라를 이용하여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강한 왕국이 성립되기도 하였다.
동서양의 무역로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를 두고 서구 열강간의 경쟁도 심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등이 이곳을 침략했고 후에 네델란드가 이 지역을 점령하여 동인도 회사를 세웠으며 1799년에는 아예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2차세계대전 기간에는 약 3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후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델란드는 집요하게 인도네시아를 괴롭혔고 그때마다 독립을 위한 전쟁을 감내해야 했다. 결국 1950년 8월 임시헌법을 만들어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고 1954년에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섬의 수만큼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 300개가 넘는 민족들이 있다. 반면 종교는 초기의 불교에서 점차 이곳과 무역을 했던 아랍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슬람이 유입되었다. 그래서 인구의 88%가 이슬람을 믿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이슬람 신도가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기독교, 천주교, 힌두교, 불교 등이 인도네시아에 존재한다.
인도네시아가 무역의 중심으로 해상실크로드에 위치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인들에 대해 가장 배타적인 국가이기도 하다. 화교들은 동남아시아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고 중국의 특징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마주보는 말레이시아는 중국어, 중국 이름, 중국 학교 등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중국의 화교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을 지속했다. 역사적으로는 1740년 네델란드 식민지 시기에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화교를 살해하고 박해한 적이 있다. 1967년에는 화교들을 살던 곳에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고 1980년대까지 거의 매년 인도네시아의 각 지역에서 화교들을 박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998년 금융위기 이후 화교배척 폭동이 발생했는데 이때 3일 동안 수천 명의 화교가 살해당하거나 강간을 당했다.
동남아 중에서 인도네시아만 유독 화교들에 대해 억압했을까하는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종교적으로 이슬람과 화교들간의 괴리가 존재한다. 둘째는 경제적으로 화교들이 돈만 밝히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어 자신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1960년대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스카르노는 공산주의 적 성향을 띠고 있었지만 중국이 자신의 반대편을 지지한다고 판단해서 화교들을 억압한 것이다.
지금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의 사람들은 화교들을 싫어하고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중국이 해상실크로드를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숙제로 넘어야 할 산이 인도네시아이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Mon, 22 Oct 2018 22:06: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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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31) - 말레이시아: 공존의 땅]]></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3]]></link>
			<description><![CDATA[얼마 전 말레이시아의 선거에서 93세의 마하티르 전총리가 선거에서 압승하여 다시 총리로 복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당선이 되고 첫 번째 행한 일이 중국과의 협력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전임자였던 나집 라작 총리가 중국과 연계해서 추진 중이던 말레이시아 동부해안철도건설(ECRL)과 천연가스관 건설을 취소해버렸다.
93세 노인의 이러한 과감한 결정에 대해 세계는 놀랐고 특히 중국은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사업에 급브레이크가 걸리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말레이시아는 중국이 일대일로를 추진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말라카 해협과 육로를 통해 동남아로 진출하려던 계획에 모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우리와 상당히 거리가 있고 교민도 약 2만 명 정도만 있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은 지역이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에서 보면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강대국이고 약 3천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GDP가 세계 36위에 달하는 국가이다.
말레이시아는 고금을 통해 동서양을 연결하는 교통과 무역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다양한 민족과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개방성을 지니고 공존의 분위기가 넘쳐나기 때문일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60%, 중국계 25%, 인도계 7% 등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으며 말에이어와 중국어, 인도어, 영어가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영어와 기본적으로 몇 개국어를 자연스럽게 하는 다언어의 능력자들이기도 하다. 종교도 비록 국교로는 이슬람교이지만 불교, 기독교, 힌두교가 공존하고 있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배척적이지 않고 상호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초기에는 말라카 왕국에서 시작하여 이슬람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이후에는 포르투갈이 그리고 네덜란드가 점령하였다. 이후 영국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말레이 반도 전체가 영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 가보면 다양한 제도가 모두 영국식 모델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게 된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 산물은 주석으로 유럽의 열강들이 초기에는 이를 위해 들어왔고 필요한 노동력을 중국의 복건성과 광동성 사람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는데 이로 인해 중국인들이 말레이시아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말레이시아의 고무가 유명해졌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고무를 많이 생산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석유가스, 목재 등도 풍부하며 세계 금융위기에도 강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 그리고 안정적인 경제적 성장 구조를 갖추고 최근에는 제조업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 동남아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와중에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데 놀란 중국은 바로 마하티르 총리를 중국으로 초청하였다.
중국에 온 마하티르 총리는 “우리는 새로운 식민지를 원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여 중국을 당황하게 했다. 중국과 말레이시아의 관계에서 중국이 오히려 말레이시아의 눈치를 보는 상황으로 변해버렸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90살이 넘은 마하티르의 강경한 민족주의와 국가이익을 지키려는 태도에 많은 양보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마하티르는 중국이 말레이시아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 중국의 일대일로에서 말레이시아가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하티르 총리의 국가를 위한 노련한 외교력은 미국, 중국, 북한 사이에서 한국이 어떤 외교를 펼쳐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Mon, 22 Oct 2018 22:03: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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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30) - 중국으로 초대된 아프리카]]></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2]]></link>
			<description><![CDATA[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아프리카의 국가 원수들을 초대하여 ‘중국 아프리카 협력포럼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아프리카 54개국중 53개 국가의 정상들이 북경에 운집했다. 아프리카가 중국으로 옮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돈으로 이들을 매수했다는 식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아마 아프리카의 정상들 중 실제로 몇 명은 중국이 주는 당근을 기대하고 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양자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모택동이 중국에서 약한 세력으로 국민당과 투쟁할 때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는데 그 중 하나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以農村包圍城市)”라는 전술이 있었다. 대도시에서 직접적인 충돌로는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농민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확장하는 전술이었다. 실제로 이 전술로 대도시 이외의 지역에서 공산당은 더 많은 세력을 포섭하여 그 실력을 키웠고 이를 토대로 국민당을 이길 수 있었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에도 이 전략을 외교정책에 응용하였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 소련에 대항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혁명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안해낸 전략이 ‘3개세계론’이었다. ‘3개세계론’은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광범위한 지역의 가난한 국가들을 중국의 편으로 끌어들여 미국과 소련에 대항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50년대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비동맹 회의에서 제3세계 국가들이 협력하여 미국과 소련에 대항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1950년대 말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은 자력갱생이라는 외교정책을 실시한다. 자력갱생이란 결국은 고립외교정책을 의미하고 많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거나 혹은 교류를 중지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압박과 자력갱생을 외치면서도 한 가지 버리지 않은 정책이 바로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였다. 특히 아프리카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한 지역중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이었다. 중국은 먼 미래에 이들이 중국에게 큰 지원군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속에서도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유대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이후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이 경제 성장을 했을 때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중국의 외교정책에서 아프리카를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많은 유학생들을 정부 장학금으로 중국에 초청하여 무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여 친중파로 양성해왔다. 
  이번 9월 3일과 4일에 북경에 모인 53개 아프리카 정상들 앞에서 시진핑은 ‘중국과 아프리카는 운명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운명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그 뿌리가 깊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모택동의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혁명전술에서 ‘3개세계론’으로 그리고 중국의 ‘일대일로’정책의 협력자로 발전해왔으며, ‘운명공동체’라는 용어를 쓰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했다.
  물론 이 문장 안에는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의 성공을 위한 강력한 희망과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적 요소가 잠재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압박을 받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53개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상들이 북경에 모여 중국과의 협력을 선언한다는 것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둘 수 있다. 중국은 이번 회의를 통해 미국과 세계를 향해 자신의 위상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자신감도 다시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Mon, 22 Oct 2018 21:58: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9) - 말라카 해협: 잊혀진 왕국]]></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1]]></link>
			<description><![CDATA[중국의 광저우를 떠난 해상실크로드가 베트남의 경제 수도인 호치민을 지나 아랍과 유럽으로 가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 있다. 바로 말라카 해협(Malacca Str)이다.

말라카 해협은 길이가 약 800킬로미터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물동량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다. 이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2.8킬로미터이고 수심도 25미터에 불과하지만 전략적 가치는 어느 곳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이 수입하는 중동 원유의 90%가 이곳을 통과하고 유럽과 인도,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많은 제품들이 말라카 해협을 이용하고 있어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원래이 해협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영해였으나 지금은 국제해협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4세기경 아랍상인들이 인도양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지나 중국의 남부까지 항로를 개척하였으며 이 해상 길을 통해 비단, 도자기, 향로 등을 로마와 유럽까지 거래하는 무역로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말라카 해협은 7세기에서 15세기까지 중국과 인도, 중동의 무역에서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고, 중국의 대탐험가인 정화(鄭和)도 6차례나 이곳을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길을 통과하는 교역량은 현재 세계 해상 무역량의 25%에 달하고 있고, 매년 10만 척의 화물선들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과 같이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들에게는 생명선과도 같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원래 말라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지역에 이전에 말라카 왕국이 존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402년에서 1511년까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말라카 왕국은 당시 해상실크로드의 중심으로 번영을 구가하였다. 말라카 왕국을 세운 왕은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써 이 지역이 이슬람 문화가 번성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이 지역에서 나는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주석을 들 수 있는데 명나라의 역사서에도 이 지역 사람들은 주석채취와 물고기 잡는 일이 주업이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지금도 말레이시아의 주요 수출품의 하나가 말라카의 주석이다. 유럽의 절대왕정이 등장하고 지리상의 발견이 유행하면서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르투갈에게 점령당하고 말라카 왕국은 멸망하였다. 이후 네델란드가 다시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영국의 해외식민지 개척이 시작되면서 네델란드와 갈등을 빚었는데 1824년 런던 협약을 통해 말레이 반도 지역을 영국이 차지하고 수마트라와 자바 등 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델란드가 통치하기로 함으로써 말라카는 다시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1895년 영국이 해협식민지을 통합해서 통치하였고 장기간의 식민지 시기를 겪은 후 1948년 2월 1일 말라야 연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말레이시아가 하나로 통일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19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술탄의 독립적 왕국을 말레이시아라는 연방정부로 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1963년에 브루나이를 제외하고 말레이시아 연방을 수립하였고, 2년 후 싱가포르가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그래서 현재 싱가포르와 브루나이는 독립국으로 존재하고 각자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과거 해상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던 말라카 왕국은 역사속에 사라지고 포르투갈, 네델란드, 영국, 말레이시아의 영토로 변해왔다. 비록 왕국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의 해상 루트인 말라카 해협으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04 Oct 2018 15:19:1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8) - 미중 무역전쟁의 시작]]></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40]]></link>
			<description><![CDATA[지금 세계경제에서 우위를 다투던 두 마리의 맹수가 닥치는대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 그 누구도 말리려고 하거나 말릴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최우선주의를 표방하면서 당선된 트럼프와 중국 굴기를 외치며 장기 집권을 준비한 시진핑의 진검 승부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자신의 경제적 손실이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누적된 경제적 적자가 중국의 의도적인 환율조작과 불공정무역으로 인해 시작되었고 자신들의 경제성장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번에 무역전쟁에 불을 붙였다. 스토롱맨을 자처하는 트럼프는 기전의 무역관행을 모두 무시하고 15%에서 25%에 달하는 엄청난 관세를 중국산 제품에 부과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에 약 5천억불을 수출하고 미국은 중국에 1500억 불을 수출함으로써 그 규모가 상대가 되지 않고 있다. 비록 중국이 미국에 대해서 보복관세를 추진하고 있지만 그 파괴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미 중국은 미국으로부터의 충격에 모든 경제적 지표가 하락하고 있으며 많은 기업들이 도산에 직면할 것이라는 소식이 대중매체를 뒤덮고 있다.

얼마전 열린 북대하 회의에서 중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미국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임전무퇴를 선언하였으나 중국의 현실은 그렇게 만만해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엄청난 기업부채와 국유기업에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 준 은행권의 부실이 서서히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경제적 압력이 높아가고 있다. 경제적 압력은 시진핑 정부의 정당성과 통치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중국 지도부에 조금씩 싹트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장기간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경제적 성과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이 이번 무역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국이 진정으로 무역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불균형한 양국의 무역수지를 개선하는데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세계무대에서 양국의 총성없는 전쟁의 서곡인지도 모른다.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경제 질서의 주역은 미국과 이를 지지하던 서방세력이었다. 이후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이제 미국을 곧 능가할 만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미국과 서방은 더 이상 중국의 성장을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칼을 빼들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입장에서 시진핑 정부가 강조하는 일대일로 정책은 미국과 서방의 국제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겠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만약 이 정책이 성공할 경우 미국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고 패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동시에 4차산업혁명에서의 핵심적 기술을 중국이 빠르게 따라오고 있어 이를 차단할 필요성도 대두했다.

인공지능, IOT 등 미래의 핵심 기술을 중국은 ‘중국제조 2025’라는 이름으로 야심차게 추진해오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지금 중국을 꺽지 않으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중국의 가장 약한 고리인 무역을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이 두 강대국의 무역전쟁의 불똥은 공급체인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우리에게도 튀고 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많은 제품을 완성하는 부품이 바로 한국산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되는 제품의 70%가 부품이나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 만약 중국이 미국의 무역보복으로 수출이 줄어들면 한국의 중국 수출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한국 경제에도 불리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의 경제에 두 마리의 사나운 맹수들의 싸움에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04 Oct 2018 15:16:0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7) - 베트남, 혁명에서‘도이모이(Doi Moi)’로]]></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9]]></link>
			<description><![CDATA[베트남, 혁명에서‘도이모이(Doi Moi)’로

오늘날 중국 경제발전의 기초에는 1978년 등소평이 설계하고 추진한 개혁과 개방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중국 정책의 기조는 개혁과 개방을 유지하고 있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서 폭과 속도를 조절하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도 중국과 같이 사회주의 국가였고 전쟁 이후의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과감한 정책을 시도하였다.
베트남이 최근 급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도이모이(Doi Moi)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베트남이 남북을 통일한 것은 1975년 4월 30일이었고, 남베트남의 모든 사기업과 외자기업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베트남 전역이 사회주의로 개조된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3년간 사회주의로 개조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회주의 개조 이후 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이 경험한 것과 같이 중공업 위주의 산업발전 전략을 채택했고 민간경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경제적 후퇴가 가속화되었다. 1979년 베트남 정부는 자신의 정책에 대한 오류를 인정하고 ‘신경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고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하였으나 그 부작용이 크게 발생했다.
베트남은 이러한 경제적 불안이 정권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과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였으니 바로 ‘도이모이’ 정책이다. 도이모이에서 ‘도이’는 변화하다, ‘모이’는 새롭게의 뜻으로 ‘새로운 변혁’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정책을 베트남의 개혁정책으로 부르기도 한다.
1986년에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정된 도이모이 정책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베트남에 맞게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 목표는 중국의 ‘경제건설 최우선’과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경제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대신 정치체제는 여전히 사회주의의 틀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베트남특색의 경제건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정책의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수출이 증가되어 점차 베트남의 경제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특히 1994년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하고 1995년 미국과의 국교정상화로 베트남 경제 발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한국의 기업들도 이때부터 베트남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호치민을 중심으로 기업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경제는 1990년대에 평균 8%의 성장을 함으로써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빠른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2006년 WTO에 가입한 이후 외국인 투자가 급증하였다. 베트남은 현재 30세 이하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활력이 넘치는 국가이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에 대한 조사가 2010년에 이루어진 적이 있는데 당시 현지에 진출한 기업의 93%가 베트남에 만족하고 있다는 통
계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만족하는 이유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충분한 노동력, 인구 1억에 가까운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문화적인 공통점이 한국과 베트남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에 대해 한국의 삼성과 LG 뿐만 아니라 일본기업과 미국의 기업들도 베트남 시장에 앞다투어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의 시작은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책이 가져온 결과이다. 한 국가의 발전과 정책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인지도 모른다. 비록 베트남이 지금은 여전히 개발 도상국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가 잘 준비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빠르게 우리를 따라올지 모른다. 오늘의 상황이 내일도 똑 같지 않을 수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그리고 올바른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엔가 상대방이 우리를 앞질러 갈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더욱 분발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싶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basis63@hanmail.net /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Wed, 29 Aug 2018 23:51: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6) - 호찌민(호지명)-베트남의 독립]]></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8]]></link>
			<description><![CDATA[호찌민(호지명)-베트남의 독립 

신중국을 건국한 인물이 모택동이라면, 베트남에도 독립과 통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 있으니 바로 호치민이다. 1975년 이전 사이공으로 불렸던 남베트남의 수도도 남북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호치민시로 그의 이름을 빌려서 지었다. 지금 호치민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관광과 사업을 위해 모여들고 있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 가면 시내에 바딘광장이 있고 거기에 호치민의 시신이 안치되어 많은 관광객들과 추모객들이 줄을 서서 반듯한 자세로 누워있는 그를 볼 수 있다. 아주 작은 키와 왜소한 몸과는 달리 강인한 정신력으로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고 베트남 사람들의 숙원이던 독립과 통일을 가져온 베트남의 정신적인 지주로 지금껏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그는 당시 가난한 농민의 집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의 가난은 그의 정신세계를 일찍 성숙시켰다. 1890년 한창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태어난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였다. 이후 1914년에서 19년까지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뉴욕에서 하인, 실습생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면서 조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키워갔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찾아가기도 했고 당시 미국의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호찌민의 외국 생활은 그를 더욱 강하고 추진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이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자로 성장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공산주의자 연맹대회에도 참석하였고 강한 어조로 연설도 하였다.
그는 아시아인으로서 식민지 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주장하였다. 농민에 대한 중시는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조금 이단으로 보였지만 베트남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해에 호찌민은 1925년 베트남에서 가까운 중국의 광동지역에서 ‘베트남 혁명청년 동맹’을 결성하고 1930년 2월 홍콩에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혁명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1년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결집하여 ‘베트민’을 만들었다.
호찌민의 프랑스에 대항하는 전략과 전술들을 살펴보면 오랫동안의 외적을 물리친 베트남의 전통적인 투쟁 방식을 응용하였다. 베트남의 험악한 자연환경과 거친 풍토를 이용하여 적들을 지치게 하고 동시에 유격전을 펼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치 천년전 중국의 공격을 막아냈던 베트남의 선조들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중국의 모택동은 중국인들을 계급에 따라 적과 동지로 구분하여 혁명을 하였다. 반면 호찌민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몰아낸다는 목표에 동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계급적 구분을 하지 않고 다 자신의 편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호찌민의 이러한 성향은 비록 혁명의 수단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뿌리 깊은 곳에는 강한 민족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1945년 9월 2일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하노이를 점령하고 바딘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토록 독립을 갈망했던 호찌민은 냉혹한 국제정치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17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마치 우리 한반도가 반으로 나뉘었던 베트남도 남북으로 강제로 분할되었다.
이후 호찌민은 독립에서 통일을 목표로 삼고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1964년 유명한 ‘통킹만 사건’으로 본격화된 베트남 전쟁은 1975년 베트남이 통일 될 때 까지 지속되었다.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였던 호찌민은 결국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에 사망하게 된다.
지금도 베트남의 곳곳에는 호찌민 주석을 기리는 구호와 문장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비록 개방과 개혁으로 베트남에 한국과 많은 외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는 여전히 호찌민이 만든 공산당이 베트남을 움직이고 있고 외부로부터 온 이방인들을 말없이 살펴보고 있다.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basis63@hanmail.net /  010-7149-8998]]></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Wed, 29 Aug 2018 23:47:5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5) - 베트남-강인한 생명력]]></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7]]></link>
			<description><![CDATA[베트남, 강인한 생명력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베트남은 생존하기 위해 수천년간 중국의 침략을 견디고 독립을 유지해왔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프랑스의 식민지를 겪었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베트남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75년 남북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캄보디아의 크메르 정부를 몰아내고 그 이유로 중국과 수년간에 걸친 전쟁을 수행했다.
수천년간 전쟁을 겪으면서도 이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인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이들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는 앞으로 베트남과의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중국은 베트남을 역사적으로 대등한 국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천년 이상을 중국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자신의 속국으로 간주해왔다. 심지어 당나라 시기 베트남 지역에 안남도호부를 떠올리면서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불렀다. 우리가 이전에 베트남 쌀을 알랑미라고 불렀던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베트남의 시작은 기원전 7세기에 동썬(Dong Son)이란 지방에서 청동기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이다. 이후 기원전 3세기에 남월이란 국가가 등장한다. 중국과의 실질적인 관계는 남월의 건국에서 부터이다. 진나라에 의해 광동지역의 관리로 보내졌던 찌어우(趙佗)는 진나라가 멸망하자 자신을 왕으로 칭했다. 이후 한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고 이에 응했지만 금방 자신도 황제라고 칭하고 한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후 국력이 강해진 한나라는 한무제때 베트남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베트남에 9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약 천년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중국의 중원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베트남의 독립전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처음에는 오나라, 나중에는 진(晋)나라, 그리고 수나라, 당나라까지 지배와 독립이 반복되었다.
당나라시기에는 아예 베트남 지역에 안남 도호부를 설치하고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멸망 이후 베트남은 939년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베트남은 수차례에 걸친 중국의 침입에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베트남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협력하기도 하고 조공도 하면서 독립을 유지하는 실용주의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줄 알았다. 이후 송나라에서 베트남을 다시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고 오히려 남송때에는 이씨 왕조를 안남국왕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몽골의 원나라가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공격하였으나 직접적인 전쟁과 외교를 통해 독립을 지킬 수가 있었다. 이후 명나라 때 잠깐 직접적인 통치를 한 적이 있으나 금방 베트남의 저항으로 독립적 국가로 인정해주었다. 청나라 시기에도 기본적으로 조공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커다란 충돌없이 지낼 수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종주권을 놓고 청일 전쟁이 발생했던 것과 같이 베트남의 종주권을 두고 1880년에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더 이상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공격한 이후 베트남은 또 지루한 독립전쟁의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그 전쟁의 끝은 1975년까지 이어져온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 베트남은 절대 중국을 자신의 위에 놓지 않았다. 자신들을 남쪽, 중국을 북쪽으로 부르거나 당나라 사람, 청나라 사람 이런 식으로 불렀다. 비록 실질적인 힘의 차이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고개를 숙였지만 이들의 마음속에 중국인을 자신들의 위에 놓은 적이 없다.
이 강한 민족성이 베트남을 그 어떤 민족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을 겁먹지 않는 국가로 만들어 주었다. 현재의 베트남은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아시아의 미래의 새로운 파워로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http://ient.or.kr
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Sun, 05 Aug 2018 20:04: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4) - 베트남-새롭게 등장하다]]></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6]]></link>
			<description><![CDATA[최근 한국의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중의 하나가 베트남일 것이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는 물론이고 중부지역에 있는 다낭에는 한국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얼마전 하노이의 유명한 호안끼엠 호수근처에서 ‘콩(Cong)’이라는 이름의 카페에 들린 적이 있다. 여기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 카페의 명물인 코코넛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 카페가 이제 한국에도 진출했다고 하니 얼마나 유명한지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오랜 동안 잊혀져 있던 베트남이 언제부터 이렇게 우리와 가까이 와있는 것일까? 현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하노이와 호치민에는 한국의 기업과 사업가들, 그리고 여행객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노이 대사관 앞에는 한국에 가기 위한 베트남의 유학생들이 비자를 받기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다.
1975년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기 이전에는 남쪽 베트남과 반공이라는 구호를 공유하였고 심지어는 군인도 파견한 적이 있다. 우리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듯이 베트남도 북위 17도를 경계로 남북이 분열되어 있었다. 북쪽의 수도는 하노이였고, 남쪽의 수도는 사이공으로 불렸다. 그러나 남북 월남이 통일되고 수도는 하노이로 불리고 남쪽의 사이공은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는 베트남을 월남이라고 부르는데 월(越)이라는 한자음을 베트남 발음으로 비엣이고 남(南)은 말 그대로 남쪽을 의미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는 오월(吳越)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자아내진다. 심지어 베트남어 중에서 몇 개는 우리의 한자음과 같은 음을 사용하여 한자문화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얘기로 자신들의 언어 중에서 70%가 한자어이고 이후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알파벳이 새롭게 만들어졌는데 그게 지금의 베트남 문자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 베트남의 위치를 보면 중국의 광동성, 광서성과 인접하고 있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해상실크로드에서 첫 번째 만나는 국가가 바로 베트남의 북동쪽인 하롱베이이다. 하롱베이는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로도 하룡(下龍)이다. 하롱베이에 가면 중국의 계림과 같은 카르스트의 기암들이 바다 위에 마치 병풍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중국에서 버스로 단체 여행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베트남어, 중국어, 한국어가 섞여서 들리곤 한다.
하롱베이는 육로로 중국과 통하고 있으며 해상 길로도 통하는 아주 중요한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많은 제품들이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로 수출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역시 하롱베이 쪽에 항로가 개설되어있다. 중국을 떠나 처음 만나지는 곳, 베트남은 우리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이며 중국과 수천년간 끊임없이 갈등을 빚어온 국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베트남 사람들도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 이유는 역사의 DNA속에 침략에 대한 아픔이 한(恨)으로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중국어를 쓰면 놀라면서 중국인이냐고 약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나중에 오해가 풀리기는 하지만 이들의 태도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읽을 수 있다. 특히 1979년에 있었던 중국과 베트남간의 전쟁과 최근에 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양국 관계를 필요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차이나 타운이 중국과 가까운 북쪽에는 형성되지 않고 남쪽 호치민에만 형성된 것을 보면 중국과 가까운 북쪽이 훨씬 더 중국에 대해 배타적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한국의 입장에서 동남아로 진출하는데서 빼놓을 수 없는 곳, 그리고 동시에 ‘China + A’의 핵심지역인 베트남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http://ient.or.kr
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Sun, 05 Aug 2018 19:57: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3) - 광저우(廣州) - 중국과 세계가 만나는 곳]]></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5]]></link>
			<description><![CDATA[중국의 광저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지명일지도 모른다. 베이징이나 칭다오에서 만나는 짝퉁의 원산지가 대부분 광저우이고 세계 각지의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광저우를 단순히 모조품의 메카라고 부른다면 광저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광저우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가 중국을 만나고 중국이 세계를 만나는 곳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게 이 지역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광저우는 한나라시기부터 해상실크로드의 중심항구였고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에 중국 최대의 항구였다. 한국의 혜초스님도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먼저 중국의 광저우에 도착했고 이후 다시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인도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 들어와서도 광저우는 중국의 가장 큰 대외무역 항구였고 중국이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항구로서 기능해왔다. 세계적으로 2천 년을 넘게 쉬지않고 항구의 역할을 한 곳은 광저우 이외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또한 광저우는 중국의 영욕의 역사를 같이 걸어왔다. 1838년 청나라 황제가 임칙서를 광동 도독으로 임명했고 그는 부임하자마자 중국에게 피해를 주는 2만 상자의 아편을 몰수하였고 몰수한 아편을 불태워 버렸다. 중국 시장을 노리던 영국은 이를 빌미로 47척의 군함과 4천 명의 군인을 보내에 광저우를 흐르는 주강(珠江)을 봉쇄하고 청나라를 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맺게 되었으며 이후 100년 이상 영국과 프랑스 등 열강의 침략과 수탈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세계의 중심은 중국에서 서방 유럽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고 지금도 그 관계는 변하지 않고 있다.
질곡의 역사를 보낸 중국은 드디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중국 정부는 광저우를 대외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현재의 광저우는 중국 광동성의 수도이고 매년 개최되는 ‘廣交會(광주수출입상품교역회: Canton fair)’에는 세계 각지의 무역인들이 모여들고 있다. 광교회는 1957년에 성립되었고 매년 두 번에 걸쳐 무역박람회가 개최된다. 봄과 가을에 열리는데 봄에는 4월 15일에서 5월 5일까지 그리고 가을에는 10월 15일에서 11월 4일까지 열린다. 이때 참여국가가 보통 210개가 넘고 20만 명의 상인들이 밀집되는 어마 어마한 규모이다. 이 시기에 광저우에서 호텔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로 할 만큼 세계가 광저우에 집중되고 있다.
광저우에 가보면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열강들이 거주했던 지역에서 과거를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시내를 돌아보면 현재의 광저우를 볼 수 있다. 도시의 여러 건물에서 영어, 러시아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가 적힌 간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길거리는 마치 세계 각국의 인종의 전시장처럼 많은 상인들이 두 손에 보따리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공항, 기차역, 버스터미널에는 끊임없는 인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심천과 광동성 각지를 오가는 트럭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광저우를 중심으로 주변의 도시들이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저우에 온 상인들이 물건을 주문하면 인근의 도시에서 그 생산한 물건들을 원하는 장소로 또 원하는 국가로 보내기에 분주하다.
광저우는 지금 중국의 해상실크로드의 중심으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중국의 각 지역에서 광저우를 거쳐 동남아로 그리고 세계로 ‘made in China’를 실어나르고 있으며 동시에 세계의 제품들이 광저우를 통해 중국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중국과 세계를 통하는 관문, 광저우는 동남아로 진출하는 한국 기업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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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Sun, 05 Aug 2018 19:51: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2) - 해상실크로드의 시작]]></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4]]></link>
			<description><![CDATA[우리가 알고 있는 실크로드는 중국의 당나라 시기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출발하여 사막을 지나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키의 이스탄불과 유럽으로 가던 길들을 지칭하여 왔다. 이러한 육상의 실크로드 이외에도 사실 바다를 통해 유럽과 세계를 연결하던 길이 있었으니 바로 ‘해상 실크로드’이다. 지금의 세계는 해상으로 더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고대 유럽에서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모방해서 만들고 싶어했으나 그 기술을 여전히 알지 못했다. 성공적인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온도가 중요했고 특히 그 열에 맞는 재료인 흙이 중요했는데 유럽에서는 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자기가 중국에서만 생산되었기에 도자기의 영어 이름이 ‘china’인 것도 그 이유가 될 것 같다.

유럽에서 값비싸게 팔릴 수 있는 도자기를 운반하는 것이 당시 많은 상인들의 고민이었다. 낙타와 말을 이용해서 도자기를 운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결국 해상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길을 일컬어 ‘도자기 길’, ‘향료의 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는 1913년 프랑스의 동방연구학자가 처음으로 명명했다.

가장 대표적인 해상 실크로드는 남해 해상 실크로드로 주로 중국의 남쪽 지역인 광저우와 취엔저우에서 시작되었다. 해상 실크로드는 일찍이 중국의 상나라 시기부터 시작되었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후 당송시기의 발전을 거쳐 명청시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동해쪽으로는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와 한국, 그리고 일본과 동남아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동해 해상항로였다. 중국의 동쪽으로 이어지는 이 해상노선에서 장보고가 당시 해상왕 이름을 얻으면서 동해 해상노선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이 항로는 약 100개가 넘는 국가들과 지역을 거쳤고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는 지구의 반에 걸쳐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초기에는 비단이 많았으나 송나라와 원나라 시기에는 도자기가 점차 가장 중요한 화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향신료도 많이 수출되었기 때문에 향료의 길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나라 시기에 광저우가 중국 최대의 항구도시였고 남중국해를 거쳐, 인도양, 페르시아만까지 이어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항로였다. 원래 이 해상항로는 육상 실크로드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동지역이 전쟁에 휩싸이자 점차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또한 선박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동남아, 말라카 해협, 인도양, 홍해에서 아프리카까지 연결되었다.

송나라에 와서는 중국의 광저우, 닝보, 취엔저우가 3대 무역항이었고 북쪽의 한국과 일본의 교역을 위해서, 그리고 중동의 아랍지역과의 교역을 위해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췌엔저우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원나라 시기에 가장 큰 항구가 될 수 있었다. 주로 도자기와 비단, 차, 금은 등을 수출하였고 향신료, 후추,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원나라 이후의 명나라는 초기에는 정허가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7차례에 걸쳐 대원정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점차 중앙정부가 해금령을 내려 해상 실크로드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유럽 각국은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는데 중국과 유럽의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8세기의 산업혁명과 동시에 해상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이 바다를 소홀히 한 중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열강의 침입과 침략에 약 100년간 고통을 받았다. 이제 중국은 ‘중국의 꿈’을 외치면서 육상뿐만 아니라 해상 실크로드의 부활을 위해 다양한 정책과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basis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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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12 Jul 2018 01:45: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1) - 이스탄불: 유라시아 대륙의 경계]]></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3]]></link>
			<description><![CDATA[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쪽으로 유럽을 향해 진행하다보면 만나는 곳이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유럽과 만나는 아시아의 마지막 여정, 그리고 유럽으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터키는 북쪽으로는 흑해를 남쪽으로는 지중해, 그리고 동남쪽에는 시리아와 이라크와 접해있다. 서쪽으로는 그리스, 동쪽으로는 조지아와 이란 등과 접해 있어 동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고대의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곳이기도 하고 유럽과 아시아의 혈통이 섞여서 만들어진 국가이다. 특히 중국의 북서쪽에 있던 유목민인 돌궐족도 이곳에 들어와 지금의 터키가 만들어졌다. 돌궐이란 말은 용감하다는 의미로 용감한 유목민족이 이곳에 와서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지만 규모는 이스탄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터키에서 가장 발달하고 중요한 도시는 바로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하나의 도시에 아시아와 유럽, 두 개의 대륙을 품고 있다. 원래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기원전 7세기에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렸고 이후 330년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다. 그리스 정교를 바탕으로 기독교 국가였으나 이후 1453년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점령하여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현재 터키는 인구가 약 8천만 명이고 일인당 GDP가 9200불에 달해 중동 지역에서 상당히 높은 경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를 근거로 유럽공동체에도 가입되어 있어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평균 연령 30세의 가용 노동인구가 전체 인구의 50%에 달해 생산과 소비가 다 가능한 경제적 발전의 잠재력이 큰 국가이기도 하다.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의 중심에 서면 두 개의 모스크 사원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소피아 성당이고 하나는 블루모스크라고 불리는 쌍둥이 모습을 하고 있다. 소피아 성당은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의 상징이었으나 훗날 오스만이 이곳을 점령한 후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바꾸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다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최대의 ‘그랜드 바자’를 만날 수 있다.

비가와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얹은 이 시장에는 아시아, 유럽, 중앙 아시아의 다양한 제품들의 매매가 이루어진다. 이전의 실크로드가 왕성했을 때 유럽으로 가는 마지막 중계무역상들이 모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열성적인 호객 행위를 보면 천 년 전의 실크로드의 중계항이었을 때도 이러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중국은 중동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터키를 설정하고 경제적 관계에 집중했다. 실제로 2000년의 중국과 터키의 무역액은 12억에서 2015년에는 215억으로 거의 20배가 증가하였다. 중국은 터키를 ‘일대일로’의 핵심적 교량이라고 선언하고 많은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수도인 앙카라에서 이스탄불까지의 고속철로를 중국이 건설하고 에너지에서의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동시에 터키는 한국에 대해서 더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터키인의 조상인 훈족과 돌궐족은 고대 중국의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을 한 경험이 우리와 상통한다. 그래서 우리를 형제국가로 인식하고 있고 한국전쟁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도와준 경험이 있다. 그래서 터키 사람들은 우리를 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터키와 이스탄불은 한국이 중동 지역과 유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멀리 떨어진 우리의 형제 국가라는 인식을 공유하여 교류한다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basis63@hanmail.net
http://ient.or.kr
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12 Jul 2018 01:42: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20) - 타지키스탄: 파미르의 나라]]></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2]]></link>
			<description><![CDATA[중국의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천산산맥은 남서로 이어져 내려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만난다. 파미르 고원을 지나면 인도와 네팔로 연결되는 히말라야 산맥이 연결된다. 이 타원형의 동쪽에는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버티고 있고 그 주위로는 쿤룬산맥과 힌두쿠시산맥이 연결되어 있다.

한때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바다였던 이 지역이 융기하여 지금은 가장 높은 산맥이 되었으니 자연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파미르 고원과 연결된 타지키스탄은 5개의 중앙아시아 국가중에서 영토가 제일 협소하지만 국경에 중국, 키르기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연결되어 있어 어디를 가든 이곳을 지나야하는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면적이 한반도의 2/3정도로 주변의 국가보다는 아주 작은 편이고 인구는 약 800만명정도 되는 국가이다. 인구의 분포를 보면 타지크족이 80%, 우즈베키스탄족이 15%이고 기타 소수민족들이 어울려서 살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로 수니파가 대부분이고 일부는 시아파도 있다. 이 지역은 파미르의 서쪽에 속해있기 때문에 많은 호수들이 소금기를 가득머금고 있는 소금호수들이다.

타지크족은 평지 생활을 하는 타지크족과 파미르 고원에서 생활하는 타지크족으로 구분된다. 고원의 타지크족은 어떤 경우에는 그냥 파미르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앙아시아 5개국가가 모두 투르크족 계열이 많은 것에 비해 타지크족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페르시안 계통이 더 많이 차지한다고 볼수 있다.

지역적인 특징으로 타지키스탄도 외부의 침입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기원전부터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이후 몽골과 주위의 침략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이 형성되어 타지크인이 되었다.

1991년에 소련에서 독립되었고 한국과는 다른 국가들과 같이 1992년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내부적으로는 국내의 정치, 경제, 종족, 종교간의 갈등으로 내전이 심화되었고 2000년에야 비로소 내전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독재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는 가난한 나라로 남아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타지키스탄도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의 핵심으로 상당한 번영을 누린 적이 있었다. 세계 3대 상인중의 하나인 소그드인의 발원지도 사실은 타지키스탄으로 한 지역의 이름이 소그드 주가 있다. 이 지역은 중국의 장안(지금의 서안)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장사도 능했던 사람들이 밀집했었다. 이 길위의 국가는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 쿠산왕조, 간다라 왕국 등 중국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지중해의 국가들까지 고대문명의 주요한 교차로였다.

실크로드 길이 막히고 난 후 이들은 험난한 파미르 고원에서도 생존을 위해 정착문화인 농경을 발전시켰다.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이 유목생활을 했던 것에 비해 이들은 척박한 파미르 지역에서도 정착문화인 농경문화를 유지해왔다.

이들은 밀과 과일을 주로 생산하는데 일조량이 좋기 때문에 스위트 멜론이 특히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낙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마약의 유통로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국인 아프가니스탄의 아편유통로로 유럽, 러시아, 중국 등에 소비되는 마약이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 보다 더 알려져 있지 않은 타지키스탄은 지금도 여행객의 발길을 환영하고 있다. 이들은 고원위의 척박함을 견디고 살아가고, 이들을 품고 있는 말없는 파미르 고원은 고대 실크로드의 낙타 대상들이 다시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basis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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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12 Jul 2018 01:39: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19) - 투르크메니스탄: 돌궐의 후예들]]></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1]]></link>
			<description><![CDATA[투르크메니스탄은 중앙아시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카스피를 통해 해양으로 진출 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동으로는 우즈베키스탄, 남으로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과 접해있다. 해안선의 길이가 1,768킬로미터로 드디어 중앙아시아의 국가 중 바다가 인접한 유일한 국가이다.

험난한 산맥과 사막을 가로 질러 실크로드를 쉬지 않고 달려온 많은 이들에게 드디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평지가 이들을 반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여기서 서쪽으로 터키로 넘어가기도 하고 아래로 내려와 이란을 거쳐 중동지역으로 가거나 아프리카 지역으로 진출 할 수도 있다.

이 지역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양의 힘의 균형에 따라 지배자가 바뀌곤 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또 페르시아 왕국이 강했을 때는 페르시아에 점령당했다. 이후 투르크족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오면서 투르크족이 점차 증가하였고, 우리나라의 고선지 장군이 바로 이 지역까지 진출하였으나 탈라스 전투 이후 이 지역은 중동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편입되어 현재도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7세기 이후 중국의 북쪽 몽고지역에 거주하던 돌궐족(투르크족)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투르크화 되었다. 중국의 북쪽 유목민이었던 돌궐족과 흉노족들의 서진과 지중해지역의 세력들이 함께 섞이면서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몽고 제국의 징기스칸에게도 정복되었고 이후 몽골의 티무르가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하여 티무르 제국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강대해진 제정러시아에게 대항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1885년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이후 1991년까지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국이 되었고 한국과는 1992년 2월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실크로드의 부유함과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한반도의 2배가 넘는 국토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스와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이 가스를 통한 전력 생산이 풍부하여 주변의 국가들,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터키 등에 수출하고 있다. 또한 기전에는 러시아에 판매하던 가스를 이제는 중국과 연결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몽고의 원나라가 우리를 지배했던 시기에 문익점이 중국에서 몰래 목화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로 당시 비단, 삼베, 모시로만 의복을 만들었던 한국에 경작이 가능했던 목화가 들어오면서 무명옷이 널리 유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작지의 40% 이상이 면화 경작지이다. 중동 지역의 먼 곳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까지 진출하게 되어 우리의 의복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은 중국과 유럽을 이어주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유전과 가스가 중국에게는 매우 필요한 에너지 자원으로 많은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2009년부터 30년간 400억제곱미터의 천연가스를 수입하기로 하였고 이를 위해 7,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가스 배관망을 건설하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특히 중국과 석유, 가스, 섬유, 운송 등의 협정을 체결하였고, 중국은 이에 대한 비용을 달러로 지급함으로써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제발전에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도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과 또 유럽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basis63@hanmail.net
http://ient.or.kr
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12 Jul 2018 01:22: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18) - 우즈베키스탄: 실크로드 최고의 상인들]]></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30]]></link>
			<description><![CDATA[고대 실크로드의 길은 열려 있는 길이어서 어느 누구를 어느 지역사람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허다하다. 역사적으로 최고의 상인 집단을 얘기할 때 유태인, 중국인과 함께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그드인이다. 아마 생소한 이름일 수 있으나 한반도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경주의 괘릉에 가면 좌우로 4개의 석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2개는 문신을 나타내는 한국인이고 나머지 2개는 아무리 살펴봐도 한국이나 동양계 인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들이 소그드인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이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와 많은 활동했다는 많은 흔적들이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괘릉의 무신상, 우리가 잘아는 평강공주와 같이 살았던 바보 온달도 사실은 소그드인이었고, 처용가의 처용도 소그드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페르시아와 유럽으로 가기 위해 꼭 지나야 했던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소그드인이라 불렀다. 이들은 무역의 종류 중에서도 값비싼 보석을 취급하였다.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후 중국과 실크로드를 따라 이들만의 무역네크워크를 형성하고 다양한 종류를 취급하면서 실크로드의 최대 상인으로 등장했다. 이후 해상실크로드가 발전하면서 점차 실크로드의 몰락과 함께 이들도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이들의 후예가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우즈베키스탄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원래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영토였고 이후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다. 중앙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일어난 많은 강대국에게 침략을 받았고 1991년 독립할 때까지는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현재 약 3천만명의 인구가 있으며 한국과는 1992년 1월에 국교를 수립했다. 고려인 동포가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약 18만명이 있으며 현지 교민도 약 3천명이 거주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아랄해를 두고 카자흐스탄과 접경하고 있고 키르기스탄, 타지기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들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 지역에 위치하여 중앙아시아의 중심국가라고 할 수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2배에 해당하고 역사적으로는 사마르칸트가 더 유명하지만 지금은 타슈켄트가 수도이고 약 50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만약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접대를 받을 때 우리와 같이 건배로 한 번에 술잔을 다 비우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위이다. 이들은 첨잔을 하는 것이 예의이고 만약 건배를 해버리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다른 이슬람과는 달리 상당히 온건한 편이고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함으로서 한국이나 외국 기업이 사업하기에는 적절한 투자환경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인구의 88%가 이슬람교도이지만 인접하고 있는 아프간이나 타지키스탄과 같은 시아파의 원리주의는 배격하고 있다. 
이 지역에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게 된 배경은 스탈린의 소수민족 분산정책에 따라 극동지역의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시작되었다. 어려운 역경을 이겨낸 우리 동포들은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한인 복권령’이라는 정책에 의해 상당히 지위가 회복되었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국과 우즈베키스탄간의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동포들은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를 결성하였고 전국에 46개의 산하 협회 조직을 두고 있다. 
한국의 중앙 아시아 진출에 있어 거의 100년간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한국 기업이나 한국 제품의 전도사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국의 기업들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할 때 우즈베키스탄의 우리 동포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basis63@hanmail.net
http://ient.or.kr
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12 Jul 2018 01:19: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17) -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 5국의 맹주]]></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29]]></link>
			<description><![CDATA[몽골 초원에서 작은 불씨처럼 일어난 징기스칸의 군대는 광야를 불태우듯 아시아 대륙을 넘어 유럽까지 엄청난 속도로 진군했다. 몽골에서 유럽에 이르는 가운데의 작은 부족들과 국가들은 블랙홀에 빠져들 듯이 몽골의 세력에 편입되었다. 몽골제국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과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제국을 이룩했다. 
이후 몽골 제국이 4개로 분할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이들의 통치를 벗어나 자신들의 부족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바로 카자흐 족이고 카자흐스탄을 세웠다. 몽골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해서 반역자 혹은 도망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기본 혈통은 투르크 혈통의 한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러시아와 긴 국경선을 맞닿고 있고 기르기스탄, 우즈베키스탄, 투크만스탄과 닿아있고 카스피해를 두고 이란, 알제르바이젠과도 마주 보고 있다. 인구는 비록 1700만명에 불과하지만 130여개의 민족들이 혼재해서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카자흐족이 66%, 러시아 인이 21%를 차지하고 기타 민족들이 있다. 종교는 대부분이 이슬람의 수니파들이고 이외에도 동방정교, 천주교, 유태교 등을 자유롭게 믿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수도는 아스타나(Astana)로 인구가 약 800만명 정도가 있고 1인당 소득이 1만불에 달해 중앙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경제력이 높은 편에 속한다. 러시아와 중국 등의 침략을 받았으나 자신들의 민족을 지켜왔고 1991년 12월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한국과는 1992년 7월에 국교를 맺었고 중앙아시아를 진출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중앙아시아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세계 각국이 이 지역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러시아 다음으로 독립국 연합에서 무역액이 가장 많은 국가이고 한국의 KOTRA도 카자흐스탄의 경제중심지인 알마티에 진출해 있다. 알마티는 중앙아시아의 금융의 허브이며, 내륙 무역수출의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이 가지고 있는 석유와 많은 자원들을 개발하기 위해 세계의 대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의 경제교류를 가장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2013년 중국의 시진핑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육상실크로드를 제안하였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가장 중심에 놓여있다고 선언하였다. 고대 실크로드에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있던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함께 실크로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다. 새로운 실크로드에서도 카자흐스탄은 그 역할을 점차 증가시키고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 중 경제발전 속도가 가장 빠르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의 중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제력은 5개국을 합친 것의 3분의 2를 차지 할만큼 그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중국, 러시아와 연결된 철도와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카자흐스탄에는 섬서촌(陝西村)이 있는데 100여년전에 중국의 시안에서 이주해온 회족(回族)마을이다. 이들은 중국의 서쪽 지역과 국경 무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미 인구가 10만명이 넘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중국의 긴 국경선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들은 철도와 공업지역을 건설하여 아시아 대륙과 유럽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중간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 역시 국교 수립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과 중국의 서부지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으며, 이들도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할 필요가 있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basis63@hanmail.net
http://ient.or.kr
http://ientedu.com]]></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hu, 12 Jul 2018 01:17: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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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16) - 키르기스탄: 40개의 부족들]]></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28]]></link>
			<description><![CDATA[키르기스탄: 40개의 부족들

시안에서 실크로드를 따라가면서 중국의 국경을 넘으면 만나는 국가, 중국의 천산산맥(天山山脈)과 파미르 고원의 중간에 위치한 나라가 바로 키르기기스탄이다. 수도는 비슈케크란 곳이고, 인구는 약 600만명을 가지고 있다. 많지 않은 인구이지만 오랜 역사와 교통의 중심이었던 관계로 다양한 민족들이 혼재해서 살고 있다. 키르기스족들이 70%에 이르고 러시아인, 우즈벡족, 위구르족, 타지크족, 카자흐족, 동간족과 우크라이나, 터키인들이 있고 고려인, 즉 우리 동포들도 어울려 살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국가의 40%가 해발 3천미터가 넘는 산악지형이고 중국과의 국경에는 천산산맥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파미르 고원이 접해있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7,439미터의 포베티산이다. 그리고 해발 1600미터에 위치한 이스쿨 호수(Issyk Kul)는 동서로 180킬로미터, 남북으로 60킬로 미터의 엄청난 크기를 가지고 있어 고원 위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키르기스탄이라는 이름은 원래 숫자 ‘40’의 땅이란 뜻인데 이 지역이 40개의 부족이 모여서 만들어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국가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탐을 내는 곳이었다. 역사적으로는 흉노(匈奴)족이 이 지역을 지배했었고 이후에는 돌궐이 또 지역을 지배했었다. 이후 위구르 족이 침략하였으나 이후 키르기스족이 이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를 제패했던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에게 속해있다가 1863년 다시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되었고 이러한 역사의 부침속에서 결국 소련이 해체되던 1991년에서야 비로소 지금의 독립국이 되었다. 2000년 이상을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강인한 민족성이 이 민족을 독립하고 생존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91년 독립한 이후 그 다음해에는 바로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였고 지리적인 위치로 중국과의 무역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1998년에 WTO에 가입하였고 국내 경제개혁을 실시하고 1997년에는 중국과의 교역이 거의 90%라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러한 성장세는 2000년대에 들어와 더 증가하였는데 중국은 키르기스탄의 4번째 무역대상국이 되었다.

키르기스탄은 자원이 매우 풍부한 국가이다. 금, 석탄, 은, 아연, 석유, 천연가스 등이 생산되고 있고 특히 금의 경우에는 세계 10대 금광에 손꼽힐 정도이다. 이곳에서 채굴되는 자원들은 독일, 스위스, 아랍에미레이트, 미국, 영국 등으로 수출되고 있다. 또한 양질의 석탄도 많이 생산되고 있어 중앙아시아 최고의 석탄 생산국이라는 칭호와 함께 다양한 대리석도 채굴되어 각국에 수출되고 있다.

반면 키르기스탄은 경공업이 발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활용품의 80%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 제품의 경우 100%가 수입품이다. 그 중 고급은 유럽 및 미국과 터키 제품을 사용하고 저렴한 제품들은 대부분이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이름없는 제품들이 이 시장에 들어오면서 중국제품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중국 제품에 대한 불만은 사실 키르기스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국가들,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에게도 상당하다. 중국 제품들이 내구성이 약하고 중금속 함유가 높아 저렴하지만 믿지 못하는 제품으로 불신을 받고 있다. 반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국과 한국 제품의 인지도는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일대일로 길을 따라 서쪽으로 진출할 경우 유라시아 대륙 깊숙이 숨어있는 이 지역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동시에 한국의 세계 시장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질 높은 제품은 우리가 어떻게 세계 시장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멀지만 길을 통하면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ue, 29 May 2018 23:14: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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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15)  - 일대일로와 한중관계]]></title>
			<link><![CDATA[https://ient.or.kr/?kboard_content_redirect=227]]></link>
			<description><![CDATA[일대일로와 한중관계

21세기 들어와 유라시아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은 이 지역에서 경제적 우위와 영향력 확대를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유라시아를 잇는 다양한 이니셔티브와 노력들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실제로 실행에 들어가거나 경제적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것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가장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의 경우 구호에 머물거나 예산상의 이유로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국교수립 이후 양국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강화하고 이를 발전시켜왔다. 특히 2013년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시작된 이후 경제의 질적 협력관계 강화는 물론 정치 및 외교부문에서도 상호소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양국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명목 세계 GDP에서 한국과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은 1.9%, 중국은 15.6%로 각기 세계 1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현재 무역규모는 한국이 약 1.1조 달러이고 중국은 약 4.3조 달러로 세계 1위를 차지하였다. 세계 경제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두 국가가 함께 공존하고 발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의 수출입 총액에서 한국은 미국, 홍콩, 일본 다음으로 4위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중국의 수출입 총액의 특성을 살펴보면 전체 188개의 국가 중 아시아의 국가가 48개이며, 비중이 55.7%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이 38개국으로 15.7%, 북미 지역이 15.5%로 비슷한 수치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입장에서도 아시아와 유럽의 비중이 거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네트워크의 연결이 일대일로 정책의 핵심인 것을 감안하면 이 정책의 성공이 중국의 경제발전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일대일로와 직접적으로 연계된 국가는 중국을 포함하여 모두 65개 국가가 속해있고, 동남아 11개국, 중앙아시아 14개국, 중동 및 아프리카 15개국, 유럽 24개국이다. 한국의 경우 중국이 작성한 일대일로의 직접적인 연선 국가는 아니지만 일대일로와 관련한 협력 국가로서의 비중 때문에 중국의 일대일로 사이트(http://www.yidaiyilu.gov.cn)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2018년 3월 20일에 정치국 위원인 양제츠가 문재인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양국이 일대일로와 관련하여 상호 협력의 필요성에 공감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일대일로 연선국가와의 교역은 동남아 뿐만 아니라 중동 및 유럽 국가들로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과 중국의 일대일로 연선국가와의 교역은 각각 2,539억 달러와 9,621억 달러로 전년대비 조금 줄었으나, 전체 대외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28.0%, 중국이 26.1%를 차지하는 등 큰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경우 최근 몇 년간 동남아 11개국에 대한 교역비중이 4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중동, 아프리카 15개국에 대한 교역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베트남과의 교역이 451억 달러로 1위를 기록했고, 중동 지역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213.9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한국의 투자 대상국 순위도 전체 352억 달러 중에서 베트남과 싱가폴에 각각 22.7억 달러와 11.2억 달러가 투자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들은 일대일로의 해상실크로와 맞물려 있는 지역들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의 추진은 한국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단순히 중국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발전시킬 수 있는 지혜를 생각해내야 한다. 길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기철 국제교육 통상연구소 소장]]></description>
			<author><![CDATA[ient]]></author>
			<pubDate>Tue, 29 May 2018 23:11: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ient.or.kr/?kboard_redirect=1"><![CDATA[column]]></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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