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86 - 중국 인물열전 (27) 임칙서(林則徐:1785-1850)와 아편전쟁

Author
ient
Date
2018-01-0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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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27) 임칙서(林則徐:1785-1850)와 아편전쟁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세 곳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를 들 수 있다. 베이징은 천년의 중국 수도로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그리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의 백년을 상징하고 있다. 상하이에 가면 경제의 수도라는 별명에 걸맞게 마천루가 나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현재 세계 500대 기업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14억 중국 시장을 놓고 총성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또 중국의 남쪽에 홍콩과 가까운 곳에 광저우가 위치하고 있다. 광저우는 중국 근현대사에서 개방의 상징적인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 곳곳의 기업가들이 이곳에서 중국의 제품들과 부자재들을 구입하는 모습을 1년 내내 볼 수 있다. 도심에는 주강이 남중국해를 향해 도도히 흐르고 있고 그 하구에는 홍콩과 마주보는 심천, 마카오와 연결된 주해가 주강(珠江)삼각지역을 이루어 중국과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중국과 세계가 연결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라 이미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 시장을 노리던 영국을 중심으로 하던 유럽 열강은 중국 정부로부터 무역허가를 받은 후 광저우를 중심으로 무역을 개시하였다.

영국과 유럽은 주로 산업혁명을 통해 대량 생산되던 방직물들을 중국에 수출하였고, 대신 중국으로부터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중국은 이미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어 자립경제가 가능했던 반면, 유럽은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의 수요가 급증함으로서 무역 역조가 발생했다.

영국은 무역 역조를 개선하기 위해 인도 등에서 아편을 제조하여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무역 대금은 은으로 결재하였는데 아편이 중국에 퍼져나가면서 빠르게 은이 유출되기 시작했고 중국의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청나라 정부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그 부모가 먹을 것은 없어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을 걸었다. 곧은 성품과 성실함으로 황제와 주위의 인정을 받아 아편문제를 해결하도록 파견된 것이었다. 광저우에 온 임칙서는 아편이 국민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중국 경제에 해악이 된 다는 것을 파악하고 아편을 몰수 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1839년 광저우 앞 바닷가에서 영국 상인에게서 몰수한 아편 약 2만상자를 불태웠다. 다음해인 1840년 영국은 군함을 보내 광저우를 공격했고 임칙서가 이를 막아냈다. 그러자 영국은 다시 천진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수도인 베이징을 위협하였다. 아편을 둘러싼 이 전쟁을 아편전쟁이라고 한다. 영국의 공격에 놀란 무능한 청나라 정부는 임칙서를 파면하고 영국과 불평등한 남경조약을 맺었다.

중국은 영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한 후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홍콩을 영국에게 할양하였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배상을 위해 세금을 올렸고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수천년간 이어져오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파면되었던 임칙서는 다시 중국 서남부 지역의 책임을 맡아 관직에 있다가 국가의 쇠망을 비통해하면서 사망하였다. 지금의 광저우는 아편전쟁의 아픔을 딛고 다시금 세계의 기업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한국인도 약 2만명이 거주하면서 중국 시장과 세계 시장을 향해 밤낮으로 뛰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