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99 - 중국 인물열전 (40) 주은래(周恩來 1898-1976): 중국의 영원한 총리

Author
ient
Date
2018-01-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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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40) 주은래(周恩來 1898-1976): 중국의 영원한 총리

중국 남쪽 절강성(浙江省)의 유명한 술 중에 소흥주(紹興酒)라는 술이 있다. 비록 마오타이나 수정방처럼 유명한 백주(白酒)는 아니지만 중국 술의 깊은 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마시는 술이다. 추운 겨울날 따듯하게 데워 그 안에 말린 매실을 넣어서 마시면 찬 기운은 사라지고 입안 가득히 향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소흥주와 같은 맛의 중국 지도자를 꼽으라면 원적을 소흥에 두고 있는 주은래 총리를 손꼽을 수 있다. 비록 모택동이나 장개석처럼 앞에 나서지 않았으나 2인자의 자리에서 중국을 이끌어간 지도자이다.
그는 중국의 가장 격동기였던 19세기말에 태어나 외세의 침략에 고통받는 조국을 보고 갓 스물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와 독일에 유학하여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유럽의 중국공산주의 청년단을 창설하였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였을 때 귀국하였고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결별한 후 장개석의 군대에 쫓겨 다니던 중국 공산당의 권력을 위한 파벌 갈등에서 모택동을 지지하여 그를 1인자로 만들어 주었다. 1936년 장개석이 자신의 부하였던 장학량의 쿠데타에 의해 체포된 ‘서안사변’이 발생했을 때도 공산당의 대표로 참석하여 평화적인 담판을 성공시켰다.
정치인, 군인, 전략가, 그리고 뛰어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주은래는 국민당과의 국공내전에서 중요한 세 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총리와 외교부장관을 겸직하여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서 새로운 제3세계론을 만들어 중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비동맹’이란 개념을 만들어 미국과 소련의 진영이 아닌 국가들을 중국편에 서도록 하였다
그의 외교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은 1971년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에서 더욱 빛났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이용해 중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대삼각관계(Big Triangle)’전략을 시도했다. 1972년 유명한 닉슨과의 회의를 통해 미중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때 닉슨에게 대접한 술이 바로 ‘마오타이 주’로 이후 마오타이는 지금까지도 중국의 대표적인 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모택동이 일으킨 급진적인 ‘문화대혁명’시기에 많은 지도자들이 탄압과 박해를 받을 때 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국가를 위기에서 건지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알려진 등소평을 복직시켜 훗날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4개현대화(농업, 공업, 국방, 과학)도 사실은 등소평이 아니라 주은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택동과 급진주의자들의 정책이 국가와 국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암에 걸려 있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업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중국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를 ‘영원한 총리’라는 별칭으로 부르고 모택동 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가 후대에 이렇듯 국민들의 신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더 우선 순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은 “순풍에 돛단 배는 사람을 단련시키지 못한다(一帆風順不能磨練人)”라는 것과 “내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데서 내 자신감이 생긴다”라는 말이다. 체제와 시대를 넘어서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권력욕이 아닌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