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51 비즈니스 삼국지 - (32) 동탁(董卓): 탐욕이 초래한 비극

Author
ient
Date
2018-01-09 14:01
Views
488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32) 동탁(董卓): 탐욕이 초래한 비극

삼국지에서 조조, 유비, 손권에 못지않게 각인된 이름이 동탁(董卓)일 것이다. 그는 한나라가 멸망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한 여포(呂布)의 양아버지였지만 중국 4대 미녀중의 하나인 초선(貂蟬)을 놓고 다투다 모든 사람의 저주를 받으면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동탁은 소수민족인 강족(羌族)과 이웃한 곳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거칠고 음모가 뛰어났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동탁은 성장한 후 강족과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만들어 이들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웠고 그 세력을 확대하여 자신의 지역도 가지게 되었다.

동탁은 세력이 커지면서 자만심과 야심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영제가 사망하고 유변(劉辯)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외삼촌인 하진(何進)이 권력을 욕심내어 성지(聖旨)를 빙자해 동탁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동탁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병사들을 소집하여 낙양으로 입성하였다.

오랜 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동탁은 문무백관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 초기에 낙양에 왔을 때 병사가 3천명에 불과했었다. 그러자 꾀를 내어 밤마다 병사들을 몰래 성밖에 내보냈다가 다음날 아침 마치 계속 병력이 증원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 이후 병력을 확충하여 막강한 군대를 가질 수 있었다.

동탁은 우선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인 한나라의 헌제(獻帝)를 허수아비로 세웠다. 이후 모든 권력은 동탁의 수중에 들어왔고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해서 수도도 장안(長安)으로 옮겼다. 자신의 거쳐도 황제의 궁궐과 똑같이 짓고 모든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면 절을 하고 말을 내리도록 하였다.

백성들에 대해서는 더욱 폭정을 서슴치 않았다. 동탁의 군대는 살인방화와 강간과 약탈을 서슴치 않고 자행했고 백성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졌으나 그의 폭정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문무백관을 초청해놓고 자신에 반대하던 관리들의 혀를 뽑고 사지를 자르고 심지어는 눈을 파내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장안으로 천도한 후 백성들이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낙양성과 인근의 모든 민가를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그 욕심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이전의 황제의 묘를 파헤쳐서 보물들을 빼앗고 심지어는 당시 화폐이던 동전도 가짜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떨어져 통화팽창이 발생했다.

견디다 못한 관리들중에 왕윤(王允)이 중국 최고 미인인 초선으로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당시 최고의 장군이던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을 시켰다. 결국 동탁은 자신의 수양아들인 여포의 손에 죽고만다.

동탁이 죽고난 후 시체를 동쪽길에 던져놓았는데 시체를 지키는 사람들이 동탁의 배꼽에 향을 꽂아 불을 붙였다. 얼마나 기름졌던지 밤에도 길을 밝히고 수일간 지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탁이 멸망한 이유는 바로 탐욕에 빠져있던 자신에게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부패의 상징으로 그리고 탐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하는 본보기로 동탁을 들고 있다. 우리도 언론에서 종종 탐욕으로 자신과 기업이 망한 뉴스를 접하곤 한다. 이들은 아마도 자신이 동탁을 닮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