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19 중국인 이야기 - (32) 동서문화 결합의 결정체, 마카오 사람들

Author
ient
Date
2018-01-09 13:09
Views
332
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32) 동서문화 결합의 결정체, 마카오 사람들

마카오는 북쪽으로는 광둥성의 주하이(珠海)와 연결되어 있고, 홍콩과는 바닷길로 60킬로 떨어져 있으며 남중국해에 위치하고 있다. 마카오(澳門)란 단어를 떠올리면 카지노, 혹은 도박의 도시가 연상된다. 실제로 마카오는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미국의 라스베가스, 아틀란타와 함께 세계 4대 ‘카지노 도시’ 중의 하나이다. 그런 이유로 마카오는 ‘동양의 라스베가스’, ‘아시아의 작은 유럽’ 등 다양한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카지노를 중심으로 24시간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마카오를 단순한 카지노의 도시라고 말하는 것은 이 도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마카오에 가면 우리가 걷는 걸음마다 그리고 구석구석에 세계문화유산이 즐비하여 모두 30곳에 이른다. 그리고 다양한 쇼와 동서양의 축제들도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다채로운 곳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마카오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 중에 중국의 영토중에서 최초로 서양의 식민지가 되었고, 또 가장 나중에 중국에 반환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마카오는 원래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에 속해있었다. 1553년 최초로 포르투갈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이후 1557년에 마카오 반도의 거주권과 대중국무역권을 획득하였다. 훗날영국이 중국과 아편전쟁을 통해 홍콩을 식민지로 삼기 이전까지 이곳이 중국과 서양의 교류기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서양의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대포 만드는 기술과 동서양의 교류에 기여한 마테오리치도 마카오를 통해서 중국에 입국하였다.

1887년 12월 1일 포르투갈은 청나라 정부와 “중국과 포르투갈 통상조약”을 맺어 본격적인 식민지로 삼았으며 이후 1999년 12월 20일이 되어서야 중국의 특별행정구역이란 이름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므로 16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약 400년이 넘는 동안 서양의 식민지로 생활하였고 인구의 96%가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화는 중국과 서양의 완벽한 결합체로 새롭게 태어났다.

마카오의 식당에 가보면 광둥요리와 포르투갈 요리가 퓨전으로 만들어져 있고 한국의 패스트푸드에서 젊은이들에게 환영받는 ‘에그 타르트’도 이곳에서 만들어져서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중국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의 혼혈을 의미하는 ‘마카니즈(Macanese)’는 단순한 혼혈이라는 단어를 넘어서서 마카오의 문화와 음식을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비록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수백년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활습관은 여전히 전통적인 중국인의 생활을 유지해오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중국에서 숭상하는 관우(關羽)와 중국의 동남연해 지역에서 수호신으로 여기는 마조(馬祖)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인 명절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이들의 문화적 혼합은 결혼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우선 중국 전통의 예법에 따라 결혼식을 올린 후 다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진행한다. 매우 재미있는 것은 마카오에 사는 포르투갈인들은 먼저 서양식 결혼식을 한 이후 다시 중국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한다.

이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융합은 이들의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백년간의 식민시기를 겪으면서 이들은 다양성에 대한 포용성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사물에 대해서도 전혀 거부감이 없다. 동시에 일을 처리할 때 우리처럼 결코 조급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미루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백년 동안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은 마카오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면서도 서양인인 동서양의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