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의 빛과 그림자 297 - 중국 인물열전 (38) 제갈공명(諸葛孔明): 충성과 의리란 무엇인가?

Author
ient
Date
2018-01-0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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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朴起徹) /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 국제교육통상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
출처: 평안신문

(38) 제갈공명(諸葛孔明): 충성과 의리란 무엇인가?

나관중이 쓴 역사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蜀)나라의 수도였던 사천(四川)의 성도(成都)에 가면 무후사(武侯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를 같이 모시고 있다. 황제였던 유비가 백제성에서 사망 한 후 훗날 당시 승상이었던 제갈량과 함께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으니 바로 무후사이다. ‘무후(武侯)’는 제갈공명의 작위이며 원래의 이름은 제갈량(諸葛亮)이고 별명은 와룡(臥龍), 복룡(伏龍)이었다. 그는 우리와 인접한 산동성 임기(臨沂)사람으로 지금까지도 중국의 위대한 정치가로 또한 군사 및 외교가로 탁월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높은 학문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말기의 혼탁한 정치를 피해 시골에 은둔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서서(徐庶)가 유비의 곁을 떠나면서 제갈량을 추천하였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갔으나 두 번이나 만나주지 않았고 결국 세 번째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한 고사성어가 바로 ‘삼고초려(三顧草廬)’로 꼭 필요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제갈량을 얻은 유비는 “내게 공명이 있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라고 할 만큼 감격했다. 세상에 나온 제갈량은 죽을때까지 자신을 알아주는 유비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 조조(曹操)나 손권(孫權)에 비해 보잘 것 없던 세력이었던 유비를 도와 촉(蜀)나라를 세우고 삼국(三國)의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그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제갈량은 조조와 손권의 모순을 이용하여 조조의 100만대군을 양자강에서 격파하였다. 이로써 조조는 자신의 시대에 삼국을 통일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후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유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했던 삼형제가 차례로 죽은 후에 제갈량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북벌(北伐)을 단행했다. 유비가 자신의 아들이 부족하면 권력을 제갈량에게 가지라고 권고했으나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충성하였다. 그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남긴 ‘출사표(出師表)’는 자신을 알아준 주군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대업에 대한 강한 결심으로 유명한 글이다.

제갈량의 북벌에 조조는 사마의(司馬懿)라는 책사를 내세워 막도록 하였다. 사마의 또한 당시에 유명한 계략가로 제갈량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원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산(祁山)이란 곳을 점령해야 하는데 번번히 실패하였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출병하였다. 그러나 사마의는 성에서 나오지 않고 시간을 끄는 지구전(持久戰)을 펼쳤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사마의가 촉나라의 사신에게 군사적인 것은 묻지 않고 제갈량의 식사나 업무량을 물어보았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승상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업무를 하시고 모든 일을 다 챙기십니다”고 하였다.

사마의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제갈량이 식사도 잘 못하고 일만 열심히 하니 얼마를 살겠느냐?”라고 하였다. 여기서 나온 말이 ‘식소사번(食少事煩)’이란 말로 몸을 해치면서 일을 하는 제갈량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실제 과로에 시달리던 제갈량은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으로 죽게 되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적을 퇴치하는 계책을 준비하였고 실제로 사마의를 물리쳤는데 여기서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도망하게 했다(死諸葛亮嚇走生仲達)”란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제갈량은 신출귀몰한 책략가로 알려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책과 지혜에 놀라지만 그가 높게 평가되는 것은 또 다른 이유라고 생각된다. 첫째, 그는 당시 세력가인 조조가 정의롭지 않다고 해서 그를 따르지 않아 정의(正義)를 지켰다. 둘째, 황제의 자리를 가질 수 있음에도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주군을 지켰으니 충성과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셋째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권력과 재산을 탐하지 않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갈량에 대한 평가와 그의 삶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한번 반추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