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9, 2018

박기철 소장님 중국 칼럼

중국, 길위에 길을 묻다(8) - 서안을 떠나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

Author
ient
Date
2018-03-3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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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중국의 출발지였던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을 떠나 서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남쪽으로는 티벳 고원과 북쪽의 기련산맥(祁連山脈)사이에 좁고도 긴 길을 만나게 된다. 원래 기련산맥은 히말라야 조산 운동때 융기했는데 그 산맥의 남쪽에 해발 1500미터의 평탄한 길이 길게 조성되었고 그 길이 바로 동서로 약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하서주랑이다.
하서주랑은 중국의 감숙성에 포함되며 감숙성의 수도는 난주(蘭州)이다. 장안에서 서북쪽으로 난주를 지나 하서주랑을 통해 실크로드가 형성된 이유는 서쪽으로는 티벳고원이 가로 막혀 바로 가지 못하고 서역으로 가기 위해 이 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하서주랑은 실크로드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묵묵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 길에는 한족, 몽고족, 티벳족, 하사크족, 회족, 만주족 등 50개의 민족이 살고 있으니 중국 소수민족의 집산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이 길위에는 불교, 이슬람교, 라마교 등 다양한 종교를 접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기 위한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 긴 통로는 실크로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시 많은 민족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돈황(敦煌)이다.
돈황의 막고굴(莫高窟)은 불교 예술의 본거지로 지금까지도 완전한 동굴이 492개나 남아있다. 벽화와 그림, 고서적 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고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불교 예술은 그 당시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었던 지역인지를 증명해주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당나라 시기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태백이 돈황에서 출생해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 그의 시에서 이곳을 표현하는 내용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더 가다보면 주천(酒泉)이란 재미있는 이름의 도시도 만나게 된다. 한(漢)나라 시기의 장군인 곽거병이 이 지역을 차지하자 황제가 술을 하사하였는데 혼자 마실 수 없어 샘에다 술을 부어 병사들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지역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다보면 드디어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嘉峪關)을 만나게 된다.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에서 약 8851킬로가 이어져 있으니 세계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데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엄청난 길이의 장성을 쌓게 된 이유는 농경문화였던 한족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었다.
하서주랑의 1000킬로미터의 통로를 차지하기 위해 서융(西戎)이 먼저 점령했었고 이후에는 월씨(月氏)가 점령했다. 한때는 흉노가 점령했고 한(漢)나라 때 다시 한족이 점령했다. 그러나 당나라 때는 티벳족이 점령하는 등 그 주인이 수도 없이 많이 바뀌어 왔다.
이렇게 모두가 탐을 냈던 이유는 바로 당시 최고의 무역로였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장안과 소주 항주 다음이었고, 중국의 휘상(徽商: 안휘성 상인), 진상(晋商: 산서성 상인), 회상(回商) 등 내노라하는 상인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 길을 통해 비단과 차가 서쪽으로 전해졌는데 하서주랑이 끝나는 곳에 신강(新疆)의 수도 우루무치가 있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면 러시아와 중동을 지나 지중해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과거든 현재든 하서주랑을 빼놓고는 실크로드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지역이다.


박기철(한중교육문화연구소 소장) basis63@hanmail.net